밀양 삼랑진 작원관지 관문성(關門城)



4월9일 투표를 하고 밀양 삼랑진 작원관지를 찾았다. 비가 많이 오는 관계로 날씨가 고르지 못해서 사진의 상태가 조금 좋지 못한점 양해를 바랍니다. 밀양읍성에 관하여 글을 적다보니 작원관에 관하여 적혀있어서 임진왜란 역사현장으로 달려 가보았습니다. 인터넷으로 살펴본 작원관은 간단한 설명이 많아서 직접 가보는 것이 좋다는 판단하에 움직여 보았습니다.
▼ 현재 작원관이 있는 위치는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이다. 작원관지에 관하여 지도에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작원관지는 양산시와 접하고 있으며 낙동강 아래로는 김해시 생림면이다.
▼ 좀 더 확대를 해서 본 작원관지이다. 지도상으로 보아도 동쪽과 북쪽은 산이 많이 있고 남쪽으로는 낙동강 서쪽으로는 밀양강이 놓여져 있다.
▼ 예전의 작원관 지도로 작원잔도란 잔도는 흙이나 돌이 흘려 내리지 못하게 가마니나 나무로 막고, 길은 돌이나 나무로 길을 늘펴서 사람이나 말이 달리기에 용의하게 만든 도로입니다. 작원관이 있었다는 것은 여기서 말을 바꿔어 타던지 일종의 검문소 역할까지 한곳으로 보아 적어도 폭 2m 정도는 되지 않아나 싶습니다.
아래지도는 해동지도에 있는 경상도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파란색으로 된 것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성이고 빨간색으로 된 것은 예전의 대로입니다. 동래를 거쳐 양산 그리고 밀양을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에 보시면 작원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낙동강과 밀양강이 만나는 지점에 삼랑이라고 적혀있고 삼랑에는 봉수대가 있다는 표시가 있습니다.
▼ 남쪽에서 본 작원관지의 모습으로 북으로 갈 수록 산들이 많이 있고 산세가 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본 모습으로 작원관지 앞에 있는 산세가 높다는 것을 알 수있다.
▼ 팔도지도에도 영남대로중 양산서 밀양을 가기위해서는 작원을 지나가야 하는 것으로 표시가 되어있다.
▼ 북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으로 김해시 영향권이라서 그런지 낙동강을 지나 산을 몇개 넘으면 넓은 평야가 나타난다.
▼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본 모습으로 산세가 험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가 있다.
▼ 낙동강변에 있는 작원관지는 우측은 낙동강이 앞은 험난한 산이 놓여져있는 천해의 요새로서 부산 동래에서 한양을 가기 위해서는 문경의 조령관과 함께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곳으로 교통 및 국방상 중요한 길목이었다.
▼ 여행하는 관원의 숙박소 기능과 왜적을 공격에 방어하는 기능, 작원진이라는 나루터로 출입하는 사람들과 화물을 검문하는 기능을 동시에 하였다. 즉 원(院), 관(關), 진(津)의 역할을 겸한 곳이었다라고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적혀있다. 일제강점기시 경부선철도에 있었던 작원관을 철도부설을 위해 현재의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1939년에 밀양군에서 비(碑)만 설치했으며, 1995년 이곳에 작원관지를 복원했다고 한다. 작원관지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경부선 철도
▼ 이제 작원관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조성되어있는 것은 작원관의 모습일부만 복원 해놓았습니다.

▼ 비가 많이와서 앵글에 물기가 묻어서 사진상태가 좋지 않음을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합니다.
▼ 작원관지에 대한 설명글
▼ 측면의 모습으로 상당히 작게 복원했음을 알 수있다.
▼ 정면의 모습으로 작원관은 고려 고종(高宗)때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정문에 한남문(稈이 한이나 간으로 쓰이는데 간남문이라고 읽어야 될지 한남문이라고 읽어야 될지 잘모르겠네요. 일단 막을 한을 기준으로 한남문이라고 적었습니다.)이라고 적혀있고 누각은 공운루라고 적혀있습니다.
▼ 여장이 설치되어있으며 총안이 있습니다. 좌우에 있는 총안은 멀리있는 적을 쏘기위한 원총안이고 가운데 있는 총안은 가까운곳에 있는 적을 쏘기위한 근 총안입니다.
▼ 성문
▼ 성문에서 바라본 양산방향
▼ 성문위에 그려져 있는 주작그림
▼ 성곽에서 바라본 공운루
▼ 예전 일본군들이 이곳으로 수없이 몰려왔을때 관군들의 입장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물러설 수도 없는 입장에서 한치의 양보없이 싸웠겠죠. 기록에 보면 1592년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한 소서행장의 왜군 1만8천700명은 낙동강을 따라 밀양으로 진군했다. 그해 4월 18일 밀양부사 박진은 300여명의 병졸과 약간의 수병.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이곳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결사항전했고 더 이상 북진을 못한 왜적은 한밤 산기슭에 수천명의 군사를 매복시켜 놓았다가 이튿날 새벽 일제히 조총을 쏘며 아군의 배후를 기습공격하니. 아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중과부적으로 군사를 거의 잃고 후퇴하게 된다. 이것이 작원관 전투이며 거침없던 왜적의 진군을 늦춘 성공적인 전투로 평가된다라고 적혀있다.
▼ 또다른 기록을 보면 밀양은 인구 천명이상의 도호부로써 도호부사는 박진이었다. 박진은 임진전쟁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선조22)에 심수경의 천거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치고 밀양부사에 임명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군(郡)내 병사 300여 명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지원을 가서 당시 성을 빠져 나온 좌병사 이각과 함께 동래성 북쪽의 소산역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박진의 군사는 1선에 배치하고 이각의 병사는 제 2진에 배치되었는데, 일본군이 동래성을 점령하자 놀란 조선군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분산되자 박진은 소산역에서 퇴각하여 밀양성으로 되돌아 갔다. 한편 이각 역시 후퇴하여 좌병영(左兵營)으로 복귀하자 안동판관 윤안성이 잔류 병력으로 본영을 지킬 것을 건의하였으나, 이각은 우후 원응두와 함께 성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고, 병사들도 모두 흩어져 버려 경상좌도 지역은 무방비상태가 되어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밀양부사 박진의 이동로를 그린 지도입니다.
▼ 근총안에서 바라본것으로 경사가 60도정도 되어 보입니다.
▼ 공운루 안의 모습
경상감사 김수는 진주성에서 전황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밀양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인근 군현의 수령들에게 밀양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실제로 밀양을 지원할 수 있는 병력은 거의 없는 상태였고 병력이 동원되었다고 해도 중간에 도주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박진은 16일 밀양으로 복귀한 후 남은 병력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박진이 병력을 모으고 있는 동안 일본군 선발대가 밀양 근처까지 접근하였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박진은 병력 일부를 양산과 밀양 사이의 요충지인 작원관 부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작원은 밀양에서 동쪽으로 40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부산에서 양산을 거쳐 밀양과 청도, 대구 등 서울을 향해 이동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특히 작원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황산잔도라는 험한 길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지세만 잘 이용하면 적은 병력으로도 대군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였다.
▼ 험한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박진 자신은 밀양성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휘하 부대만을 배치시킴으로써 가뜩이나 소규모의 병력을 더욱 분산시킨 것은 별로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었다. 고니시는 주력군을 이끌고 선두에 나타나 조선군의 주의를 그쪽으로 집중시킨 후 별동대를 내륙의 산악지형으로 우회시켰다. 일본군의 우회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박진은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의 직속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우회 부대을 요격하려 하였으나 병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였다. 그 때 정면의 주력군도 공격을 시작하여 앞과 옆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조선군의 방어선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이 작원관 혈전은 임진전쟁 발발 후 최초의 전투다운 전투였다. 낙원관 전투를 그린 지도입니다. 제가 위의 이야기를 보고 재구성한 것으로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공헌루 현판과 단청무늬
▼ 공헌루안의 대들보와 서까래의 모습
작원관 전투가 끝날 무렵 경상감사 김수의 독려에 의해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인근 군현에서 지원하러 오던 소규모의 부대가 일본군의 선발대와 조우하여 접전을 벌이던 중 이들을 일본군의 주력으로 오인하여 급히 퇴각하다가 수많은 병사들이 낙동강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박진은 작원관 방어선이 무너지자 성 안의 각종 시설과 군량창고를 불태운 후 도주하였다. 성이 불타는 것을 본 일본군은 다음 날인 19일 산에서 내려와 성을 점령하였는데, 이 와중에 밀양성을 지키던 군민 300여 명이 살해당했다.
▼ 공헌루안의 여장의 모습으로 여기서부터 이상하네하는 생각을 지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려때 만든 작원관이 없어져서 1995년에 복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장은 수원화성에서 본 여장과 닮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우리나라 최초로 여장에 돌과 벽돌로 구워서 여장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전에 만든 작원관을 복원하면서 벽돌로 만든 여장을 만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공헌루를 들어오기 위한 협문옆으로도 벽돌로 만들었다.
▼ 여장부분도 마찬가지로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남한산성 등에서 흔히 보는 성곽과 같은 구조이다. 아 여기서 멍해진다.
▼ 아래 사진 3장은 조선시대 영남의 길목을 지켰던 문경세재의 조령관이다.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서울을 가기위해서 반드시 거쳐가는 길목 중 하나인 작원관과 조령관이면 그시대 당시 비슷한 모습이거나 재료또한 비슷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하지만 두곳을 비교하면 차이가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조령관도 복원을 하였기에 여장도 예전것이 아니지만 성곽의 돌과 여장은 조선시대의 모습과 닮아있지만 작원관은 그렇치가 않은 것 같다.(사진 3장의 출처 http://cafe.naver.com/museumstudy )



▼ 기왕 돈을 들여서 복원을 하려면 고증에 맞게 복원을 해야하는데 대충한 느낌이 든다. 요즘 읍성을 복원하는 것이 유행이다시피 할 정도로 많이 하는데 고증에 맞게 시대상에 맞게 복원을 하였으면 한다. 다시 작원관을 와서 단청과 익공위에 주작의 모습이 보입니다.
▼ 작원관 앞에서 본 천태산 줄기인데 이름은 모르겠네요.
▼ 벽돌로 만든 여장
▼ 작원관 복원 기념비


▼ 작원관의 전투는 패했지만 밀양부사 박진과 병사들의 노력으로 하루라는 시간을 벌였다. 하지만 준비가 안된 조선은 일본군에 의해 강산이 짓밟히는 순서만 남았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은 천헤의 방어시설을 갖춘 작원관이지만 패배의 원인은 무엇일까? 인원의 부족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그 보다 이 작원관으로 모일 수 있게끔 연락망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한다. 김해읍성과 창원읍성에서 지원을 나왔다면 어떤 결과가 이루어졌는지 모르겠다. 물론 김해읍성이나 창원읍성 또한 병사가 없고 방어를 해야하는 입장에서 지원병을 줄 형편도 안되었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하지만 상주, 대구, 의령, 영산 등은 지원을 해줄 형편이었겠지만... 위에서도 이야기 하였듯이 각 고을에 연락하여 지원병을 보내라고 했지만 병사도 없었고 가는도중 많은 수의 인원들이 탈영을 하였다고 한다.
▼ 기록에 의하면 동래성을 제외한 성주들은 성을 버리고 도주를 하였다고 한다. 그중 밀양부사 박진 또한 일본의 조선침략에 대해 어쭐주 모르고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밀양부사 박진은 다른 고을의 성주들과 연락이 안되었던 느낌이 든다. 밀양부사 박진에 관하여 살펴보면 작원관 전투에서 패하고 밀양성을 소각하고 후퇴한 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나머지 병사를 모으고, 별장 권응수를 파견하여 영천의 의병을 지휘하게 하여 영천성을 탈환하였다. 이어서 안강에서 16개읍의 병력을 모아 경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한 달 뒤에 군사를 재정비하여 경주성을 다시 공략하여 성을 탈환하였다. 선조 26년(1593) 독포사가 되어 밀양·울산 등의 싸움에서 이겼고, 경상우도·전라도·황해도 등의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뒤에 참판에 이르렀다.
▼ 기념탑
▼ 작원관옆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 작원관지 기념탑
▼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 이수광(李수光)이 말하기를, “박진(朴晋)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 하였다. 영남 사람들은 오로지 밀양의 방어만을 믿고 있었는데 밀양이 이미 스스로 무너지자 적은 아무 장애도 없이 승승장구하였다. 비록 그때 왜적의 기세가 하늘을 뒤덮었지만 그들의 승승장구하는 기세를 펼치도록 한 것은 실로 박진의 소치였다. 진은 순찰사가 군령을 집행할까 두려워 감히 바로 순찰사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순찰사가 근왕(勤王)하는 일로 충청도에 도착하자, 진은 그의 친한 사람을 시켜 순찰사에게 통정(通情)하도록 하여 군령을 집행하지 않을 것을 안 뒤에야 비로소 나타났다. 순찰사도 역시 실지는 형벌을 시행할 뜻이 없어 진을 뜰 아래에 꿇려 놓고 잠시 꾸짖는 말을 하고는 즉시 풀어주었다. 대개 순찰사는 진과 서로 친하였기 때문에 비록 거느린 휘하의 여러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부득이 약간 꾸짖는 말을 보였지만 일찍이 치계한 말에서는 진이 공로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그 곡절을 모르고서 죄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까지 주어 당상으로 승급시켜 병사(兵使)로 삼기까지 하였다. 뜰 아래에 꿇렸던 그 이튿날, 병사로 제수하는 관교(官敎)가 이르니 진이 순찰사에게 하직하고 영남으로 도로 내려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말한 이가 없었으되 유독 성일(誠一)만이 이렇게 직절(直切)한 말을 하였다. 왜적을 정벌하는 명나라 장군들이 한창 창궐하는 왜적을 이미 물러갔다고 천자께 거짓 주달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천자를 속인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여서 이목(耳目)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는 데도 이와 같은 것이 있으니, 이로써 말한다면 옛날 사람들의 변공(邊功)에도 더러 이런 거짓된 일이 있었을 것이다.
▼ 진(晉)은 얌전하고 아담하여 선비같을 뿐 기국이 협소하여 많은 무리를 부릴 만한 재주는 없었다. 왜적이 동래를 함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작원(鵲院)으로 나가 진을 치고서 황산(黃山)의 잔도(棧道)를 방어하였는데 바야흐로 싸울 때에 이각(李珏)이 화현내(化縣內)에 있다가 먼저 도망하니 왜적이 포위하여 진의 후편으로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은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밀양으로 달려와서 먼저 창고와 군기(軍器)를 불사르고 어미와 아내를 피란시킨 다음 몸소 수하의 정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풍찬 노숙하면서 왜적이 가는 곳마다 출몰하여 응원하고 계속 왜적의 형세를 신속히 통보하였다. 본도에서는 당초에 진이 밀양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말하기를, “나이 젊은 무부(武夫)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서 위급해지자 성을 버렸으니 그 죄는 주살(誅殺)하여야 마땅하다.” 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성을 나온 뒤에는 하루도 편히 쉬지 않고 하루도 갑옷을 벗지 않고서 동서로 달리며 칼날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싸웠다. 왜적이 이미 온 도내에 가득하여 여러 고을의 모든 장수들이 한 사람도 제 고을에 있는 이가 없었으나 유독 진만이 이와 같이 하니 영남에서 온 사람은 진의 공을 대단히 칭찬하였고, 전후의 장계도 모두 진의 통보에 의하여 왜적의 실정을 아뢰게 되었으니 조정에서도 그를 가상하게 여겨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이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진의 하는 일을 보니 이미 사생(死生)을 각오하고서 반드시 적과 싸워 죽으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엾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르기를, “진이 죽는다면 의사(義士)가 아니다. 영남에 진이 없다면 국가가 보전될 수 없는데 진이 어찌 작은 절개를 위하여 국가의 큰 계책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적을 따라 진퇴하는 것만 못하다. 어찌 초야(草野)에서 죽어서야 되겠는가.” 하였으니, 당시 진을 의뢰하여 소중하게 여김이 이와 같았다.
▼ 낙동강 우측옆이 삼랑진읍입니다.
▼ 작원관 전투에서 있었던 장면들을 재현한 부조물
▼ 바야흐로 진이 작원(鵲院)에서 패전하여 돌아올 적에 도중에서 굶주려 수하의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민가(民家)로 달려 들어가니, 언양(彦陽)의 선비 세 사람이 막 음식을 성대히 마련하여 왜적을 맞이하려다가 진 등이 온 것을 보고 두려워 어떻게 할 줄을 몰라했다. 진은 손수 그 선비들을 참수하였는데, 그중에 한 사람은 전일에 학행(學行)으로 계문(啓聞)되어 누차 전조(銓曹)의 주의(注擬)에 참여되었던 자이다. 이 뒤로부터 진은 선비를 만나면 반드시 조롱하기를, “학행으로 칭송된 자가 위급할 때를 만나 이 꼴이니 그 학행이라는 것을 내가 알 만하다.” 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이 초유사(招諭使)가 되어 온 도의 관병을 전관(專管)하면서 진에게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금하려고 공문을 보내 꾸짖자, 진이 회보(回報)하기를, “나이가 젊은 무부라서 사체를 모릅니다마는 본직(本職)을 제수한 관교(官敎)를 보니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삼는다.’고 하였으니 본도의 병마를 본인이 통제해야 합니까? 초유사가 통제해야 합니까? 반드시 먼저 이 문제를 논하여 결정한 뒤에야 일이 하나로 귀착되겠습니다.” 하니, 성일이 화를 내었다.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김수를 공격하려고 할 때 진이 병사(兵使)로서 좌도에 있었는데 수와 재우에게 공문을 보내기를, “광생(狂生)이 본성을 잃어 이런 불궤(不軌)한 말을 한 것이니 모두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이와 같다면 병사가 아무리 용렬하지만 군관 10여 명을 보내어 재우를 결박하여 산 채로 휘하에 바치겠으니 순상(巡相)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이 때문에 본도(本道)의 선비들이 대부분 진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단점을 들어 헐뜯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중에 유식한 사람들은 모두, “영남에 진이 없었다면 결국 왜적의 소굴이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만약 진이 국량이 협소하여 많은 무리를 다스릴 만한 재주가 없다고 한다면 모르지만, 종시(終始)에 세운 일체의 공까지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한다면 옳지 않다. (출처 초기 의병활동 보고/김성일)
▼ 수시로 지나가는 KTX기차
▼ “박진(朴晉)의 사망은 중국 장수에게 구타를 당해서입니다. 죽은 뒤에 보니,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 합니다. 국가의 일로 죽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욱 참혹합니다. 지난번에 홍계남(洪季男)의 노모(老母)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도록 명하자, 중외(中外)가 모두 감격했었습니다. 박진이 홍계남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에게도 노모가 있으니 구휼하는 은전(恩典)이 내려져야 할 것입니다.”
▼ 기록에 의하면 박진부사는 밀양읍성을 소각한 것은 맞는 것 같다. (선조실록에 이순신이 보낸 장계에 나온다.)이는 작원관전투에서 패하고 밀양성을 소각한 것으로 나온다. 밀양부사 박진 또한 이렇게 불안하였는데 다른 고을이나 다른 성주 또한 마찬가지 었으리라 생각한다. 동래읍성을 점령하고 올라올길이 뻔하지만 준비를 하지 않은 박진부사(전체병력을 작원관으로 왜 보내지 않았을까?)와 다른 성주들때문에 천혜의 방어선을 두고 무너져 내려갔던 것이 사실로 여겨진다. 목숨을 걸고 작원관을 방어를 했던 것은 사실이나 미리 알고 병사들을 모아서 방어를 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작원관전투이다. 물론 300명도 안되는 병사들을 가지고 18,000명이나 되는 대군을 막는것은 어려운 싸움이었겠지만 그래도 미리 방어를 하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 작원관 관리사무실과 화장실
▼ 주차장앞 화장실
▼ 주차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2분정도 걸어가면 작원관이 나옵니다.
밀양성에 관하여는 밀양성보기 밀양부사 박진과 이름이 같은 6.25때 박진지구전투 클릭하세요.



덧글

  • 샤치호코 2009/02/08 14:24 # 삭제

    임진왜란 이후 척계광의 기효신서가 조선에 보급되면서, 기효신서를 토대로 군제가 개편되었고(삼수병운용), 성제 또한 기효신서를 토대로 중국의 성제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고 합니다. 성곽 축조시 벽돌을 사용한 것은, 수원화성이 처음이 아니고, 임진왜란 이후의 성제들에게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형태라고 하더군요. 서치상 교수의 '『紀效新書』도입 직후의 새로운 城制 모색' 이라는 논문이 도움이 될 듯 하네요.
  • 팬저 2009/05/08 19:00 #

    좋은 지적과 논문소개 감사드립니다. 초보의 부족함을 알려주어서 감사하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부산촌놈 2010/07/04 14:25 #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유적이군요.

    저렇게 뜻깊은 곳을 저렇게 방치하다뇨;;

    철도까지 놓여 있어서 후세에 완벽히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화가 납니다.
  • 팬저 2010/07/04 15:40 #

    아쉬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앞으로 영원히 복원을 하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인근에 복원한 작원관지의 경우 좀 더 고증을 거쳐서 복원을 하고 작원관에 관련된 이야기를 알려 줄 수 있는 공간이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 부산촌놈 2010/07/04 14:28 #

    그나저나 관문성의 구조는 다른 성들과 다른가요?

    작년에 수학여행을 기회로 문경새재 조령관에 간적이 있는데 한 지역을 둘러싼 성곽의 모양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의 통행을 막는 담장의 역할을 하는 느낌이었거든요.
  • 팬저 2010/07/04 15:42 #

    관문성의 경우 변방이나 통행이 많은 곳, 주요길목에 설치를 하는데 별 다른 것은 없다고 봐야합니다. 문경세재 조령관의 경우 3개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현재 옹성이 없는 것으로 봐서 나성의 역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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