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읍성지를 찾아서_02 읍성(邑城)



도로를 건너서 만난 가정집의 담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성곽에 사용된 돌들이 담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서측 성곽의 담과 연결된 곳에서 본 수도꼭지로 아래 물받이 부분이 돌들로 만들어 놓았는데 신기하여 찍어보았습니다.
▼ 서측성곽에서 조금 오니 의령초등학교를 만났습니다. 직감적으로 동헌이나 객사건물로 생각했는데 사진상으로 보이는 곳이 동헌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이 들고 (의령군청입니다.)
▼ 보이는 학교 건물은 객사로 추정이 됩니다.
▼ 제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것이 의령초등학교 정문입니다. 정문을 기준으로 T자형의 도로가 조성이 되어있는데 예전 조선시대때의 동헌이나 객사들은 T자형의 도로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죠.
▼ 의령초등학교 정문에서 바라본 의령읍성 주 간선도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도로입니다. 지금은 좁아서 일방도로로 사용이 되고 있었습니다만 예전에는 의령읍성에서 가장 통행량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 위사진의 우측면에 있던 의령읍사무소로 위치로 보아서 예전 의령읍성의 관아로 추정이 됩니다.
▼ 의령초등학교에서 직선으로 쭉 내려오면 만나는 것이 의령상설시장입니다. 읍성의 경우 보통 동헌이나 객사에서 이어진 길을 남측으로 내려오면 만나는 것 중 하나가 시장이었는데 의령읍성 또한 마찬가지 였습니다.
▼ 상설시장에서 서측방향으로 길을 가다가 만난 고목으로 보통 성문 바깥에 정자나무들이 많이 있었는데 저기에 있는 나무도 성문밖에 있었던 나무였울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 버스정류장 부근이 서문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 의령상설시장 뒤편으로 남문이 이곳이지 않나 싶습니다.
▼ 의령축협건물옆으로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도로가 나있었는데 옹성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도로와 건물이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그것을 기준으로 본다면 의령축협건물중 축산물판매장과 의령축협사이 정도에 남문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의령축협에서 남측을 바라본 모습으로 조금만 나가면 남천이 나옵니다.
▼ 이제 의령천이 있는 곳으로 나와 보았습니다. 의령천은 흘러 남강과 만나게 되는데 보통 읍성이나 산성의 경우 해자가 있는데 의령읍성의 경우 해자부분을 찾을 수 가 없었습니다.(복개를 했거나 덮어버려서 보이지 않을 수 도 있지만요,)
▼ 의령천의 폭이 어느정도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의령천은 흘러 정암바위까지 가는데 임진왜란당시에 곽재우장군이 승리한 곳입니다. 의령읍성은 임진왜란이 있기 얼마전에 축성을 완료했는데 곽재우장군이 의령읍성에서 싸우지 않고 정암전투를 치룬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의령읍성에는 현감이 있고 관군이 있기때문에 의병들의 입장에서 껄거럽게 작용한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지시도 따라야 하고 그러면서 불화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위해 정암으로 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찌 되었던 정암을 선택한 것은 곽재우장군의 정확한 판단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지금 의령군의 가장 중심적인 역활을 하는 도로입니다. 의령군청에서 충익사로 오는 직선으로 된 도로입니다.
▼ 보통 읍성의 경우 현감,군수,부사,목사 등의 공적비가 있는데 의령읍성의 경우 발견을 하지 못하고 정암방향으로 나오다가 만난 것이 의령읍성 현감들의 공적비입니다.
▼ 공적비는 20여개가 있었는데 백야오거리에 있어서 신경써지 않으면 그냥지나치기 쉬운곳에 있었습니다.
▼ 공적비는 크기가 틀리거나 모양이 틀린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시대가 틀린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고 석공들의 솜씨가 틀리겠지라는 추측만 가져 봅니다.
▼ 공적비 하단을 보니 거북이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옮기면서 사라졌는지 알 수 가 없습니다.
▼ 이 공적비들이 원래 있었던 의령읍성 성문앞까지 가려면 엄청난 시간이 지나야 될 것 같습니다.
의령군청 
앞에 있는 의령교육청, 의령경찰서, 농협 등도 조선시대 관아건물로 추정이 됩니다.





덧글

  • 유진우 2008/09/21 12:39 # 삭제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은 의병들( 사실상 민병대 )을 이끌고 읍성에서 농성전을 전개한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이기 때문인 가능성도 큽니다.
    더구나 상대는 120년의 센코쿠지다이로 단련된 장창을 앞세운 밀집 보병대인데( 여기에 더해 당시 의령 정암진으로 진격해 들어온 제6군 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100만석 이상의 영지를 보유한 대 다이묘인 제7군 사령관 "모리 데루모토"의 친척입니다 ) 내성이 없는 평산성에서 싸운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자살행위이기 때문에 차라리 정암진 나루 같은 곳에서 매복 공격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겁니다.
    그러나저러나 당시 어지간한 읍성의 관군이 다 도망가버려 경상도 일대의 주요 읍성들이 전부 일본군에게 함락된 판국인데 과연 의령에도 관군이 있었을까요? 하는 생각도 드네요
  • 팬저 2008/09/21 23:01 #

    의령읍성안에 관군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아직 파악을 하지 못했습니다. 곽재우장군이 의병을 이끌고 정암으로 간것은 실질적으로 인원이 많이 되지 않으니 게릴라 전술을 써기 위한것도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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