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4년(광해군 6)에 고성부의 서쪽 도선부곡에 처음 설치되었다. 이후 1619년(광해군 11)에 이곳으로 옮겨와 무관 종9품의 별장을 두고 통영전사에 전속시켰다. 진기에는 동헌을 비롯한 각종의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이 시기 설치된 포수청도 보이고 있다. 해안의 선소는 어변정으로 표기되어 있다. 1871년의 영남읍지에는 여타의 만호진과 마찬가지로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있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 1872년 지방지에 보면 고성부 동측에 남촌진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래 통제영은 당시 고성부 소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성부에는 통제영과 함께 5개의 진을 관리를 하였는데 사량진,소비진,삼천진,당포진 그리고 남촌진이었습니다. 1872년 지방지를 보면 사량진,삼천진 그리고 남촌진은 진성이 없는 것으로 나오는데 원래 없었던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가 없습니다. 1872년 당시 고성은 상당히 큰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고성과 통영을 관할하는 구역이었으니까요.
▼ 남촌진은 지금의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 일원으로 적진포해전이 벌어졌던 당동과 당항포해전이 벌어진 당항포와 가까운 곳이다. 진성이 없었던 이유는 이곳이 일선부대가 아닌 제 2선부대라는 개념이 강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거제에 영등진,장목진,조라진,옥포진,지세진,율포진,가배량진 등이 먼저 적을 맞이하기 때문이죠.
▼ 고성 면화산 아래가 남촌진이 있었던 곳입니다.
▼ 차를 거류면 사무소가 있는 당동에 도착하여 남촌진이 있는 방향을 가름해보았습니다. 지금 보이는 사진에서 왼쪽 맨 끝이 남촌진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입니다.
▼ 당동과 가까운 상원까지 갔다가 남촌진의 흔적을 발견을 할 수 없어서 포기하고 가려다가 네비게이션에 길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 없지 싶어서 화당리까지 차를 몰았습니다.
▼ 화당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상당히 오래된 나무가 있었습니다.
▼ 나무 주위로 성곽의 흔적과 같은 돌들을 보았는데요.
▼ 일정한 폭과 높이로 되어있는 것으로 봐서 남촌진의 성곽이 아니었나 추측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성곽으로 사용하기에는 성돌들이 작아 보였지만 밑에 사진을 보고서야 성곽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하였습니다.
▼ 큰 나무 뒤에 있는 공적비로 이곳을 거쳐간 수군만호의 공적비였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1872년 지방지에 나온 남촌진이 이곳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 공적비 바로 앞의 공터(?)로 생각보다 큰 규모가 있어서 이곳이 예전 관아 건물지가 아닌가 생각하는데 확실하지는 않고 추측만 합니다. 그리고 1872년 지방지에는 성곽이 없었다고 하는데 성곽의 흔적을 알리는 없고 다만 위 사진에서 본 것과 같이 일종의 성곽으로 추정하는 것만 보았습니다.
▼ 보이는 포구가 예전 남촌진의 포구와 같은 곳으로 생각이 됩니다.
▼ 1872년 지방지에 나온 남촌진의 그림을 기준으로 보면 남촌진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가구 수가 많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전 기록에는 가구수가 400가구가 넘었다고 합니다.
▼ 바라보이는 산들은 고성군 동해면방향입니다.
▼ 포구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으로 위 관아지 건물 추정한 곳이 아니라면 1872년 지방지에 나온 그림을 기준으로 보면 보이는 곳이 관아지들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이곳에는 옛날 이순신 장군의 예하부대 진지였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예하부대의 진지로 구축되어 왜적들의 침략노선을 막기 위한(현재 1개대대)진지를 구축 형성하였다고 합니다.
아직 남촌진에 관하여는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고성군이나 문화재청에서 여유가 된다면 이곳에 발굴조사를 하였으면 하는데 많은 예산이 없는 관계로 힘들어 보입니다.















덧글
잘 봤습니다.
좀더 많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것 같습니다. 문헌도 많이 찾아야 겠지요.
고성은 지금도 면적 면에서는 아주 큰 군입니다. 관내 경찰 지서만 28개 인가 됩니다.
( 비슷한 인구의 구 삼천포시는 6개 ;; )
둘째 대동지지에 따르면 적진포 30리. 적진향 20리로 표기.적진포는 고려시대의 적전포.
셋째 한자 표기상 쌓을 적자와 붉은 적자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하고 이순신도 지명표기의 중요성을 알았을 것이다.
'저도를 지나 고성의 경계에 있는 적진포'라고 분명히 밝힌 점에 주목한다. 정진술 교수는 적진포 해전지가 동해면 내산리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1619년(광해군 11년)에야 남촌진이 거류면 화당리에 설치되어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촌진이 적진포라면 왜군은 종 9품 별장과 군사가 지키고 있는 이 곳을 굳이 공격했을까.
둘째 대동지지에 따르면 적진포 30리. 적진향 20리로 표기.적진포는 고려시대의 적전포.
셋째 한자 표기상 쌓을 적자와 붉은 적자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하고 이순신도 지명표기의 중요성을 알았을 것이다.
'저도를 지나 고성의 경계에 있는 적진포'라고 분명히 밝힌 점에 주목한다. 정진술 교수는 적진포 해전지가 동해면 내산리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1619년(광해군 11년)에야 남촌진이 거류면 화당리에 설치되어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동여도와 대동지지를 참고해 주세요.. 부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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