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향교 향교



동래향교는 1392년(태조원년)에 국가의 교육진흥책에 따라 지방에 향교를 설립 함에 따라 설립되었다고 추정된다. 그 후 임진왜란때 동래성 함락과 함께 불타 버리고, 왜란이 끝난 후인 1605년 (선조38)에 동래부사 홍준이 재건하였다. 원래 읍성 동문밖2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보통 향교는 읍성 밖에 설치를 하였습니다.) 1704(숙종30) 유생들의 소청에 의하여 다음해 동래부 동쪽에 있던 관노산 밑으로 이전 하였다가 그 후 학소대, 인생문 부근 등으로 여러차례 옮겼다가 1813년(순종13) 동래부사 홍수만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습니다.
▼ 반화루의 현판이 보입니다. 보통 향교의 경우 풍화루가 많이 있던데 동래향교는 반화루입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동래향교에 종6품의 교수1명이 있고, 학생의 정원은 70명으로 되어 있으며 또 향교의 유지와 관리를 위하여 학전 7결이 지급 되었다고 한다. 동래향교의 대성전에서는 춘, 추 두 번의 제향이 거행되었고, 지금도 음력 2월과 8월의 초정일에 유림에 의해 향사가 받들어지고 있다. 향교는 조선시대에 지방재정에 의해 설치, 운영된 공립 중등학교격인 교육기관으로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와 유생에게 유학을 교육하는 교학기능과 함께 지방의 문화 향상 등 사회교화기능도 갖고 있었다. 향교의 교수, 훈도직은 정규관원으로서 임명 하도록 하였고, 학생정원은 부, 대도호부, 목 90명, 도호부 70명, 군 50명, 현 30명 으로 규정하였다. 향교에는 공자 이하 중국의 저명한 유현(儒賢)과 우리나라 역대의 유현을 모시고 있는 대성전(大成殿)과 학업을 강의하는 명륜당(강당)을 비롯하여 교생들이 기거하는 동, 서의 양재가 있어, 중앙에 있는 성균관을 축소해 놓은 것 같았다.
원래 향교는 각 지방에 유교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을 창업했던 태조 이성계는 뛰어난 유교적 합리주의자인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여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유교이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당시 고려사회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과 갈등이 극에 달하였고, 무엇보다도 불교에 의한 폐해가 심했다. 따라서 혁명이나 개혁이 필요했는데, 정몽주 등은 개혁을 하고자 한 반면 정도전를 비롯한 진보적인 학자들은 혁명을 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지도이념으로 유교적 합리주의를 받아 들였고, 이를 실현할 매개체로써 당시 신군부세력인 이성계 일파와 손을 잡은 것이다.
역성혁명에 성공한 집권세력은 유교이데올로기를 백성들에게 자세히 알리기 위해 각 지방에 향교를 세웠다. 엄밀히 말하자면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각 지방의 관학교육기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확대 개편한 것이었다. 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각 지방에 세운 사립학교가 ‘서원’이라면, 향교는 정부가 세우고 지원했던 지방의 공립 중등학교였다. 즉, 향교는 오늘날의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며 국립대학인 성균관보다는 낮은 단계의 교육 기관이었다. 또한 향교는 단순히 교육기관의 역할 뿐만 아니라 유교를 탄생시키고 발전시킨 성현들에 대한 사당으로써의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부산일보 발췌)
▼ 동래향교의 서재로서 지금의 기숙사와 비슷한 기능을 하였다고 봅니다.
▼ 대성전을 가기위해 반화루를 거치지 않고 지나가는 문으로 명칭을 무엇으로 사용하는지 모르겠네요.

▼ 초석의 모습으로 팔각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 대성전을 들어가기 위해서 꼭거쳐가야하는 협문(?)

▼ 동래향교의 담장
▼ 반화루의 모습
▼ 공적비와 반화루의 모습

▼ 반화루옆에 배수로가 보이는데 배수로는 ㄷ자형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 반화루의 초석으로 위에서 본 초석과 크기면에서 차이를 보여줍니다.
▼ 반화루의 협문옆에 있는 초석의 모습
▼ 반화루 누각을 지탱하는 기단석의 모습
▼ 보통 출입하는 협문으로 향교의 문은 읍성의 성문과 달리 높이가 낮았습니다. 이는 학문을 배우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라 하는 뜻이 포함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 명륜당의 모습이 보입니다.
▼ 서재 뒤편에 보이는 협문의 모습
▼ 명륜당앞에 있는 동재
▼ 명륜당의 현판과 처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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