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양읍성과 임진왜란 읍성(邑城)



곤양은 해안의 전략지역임과 동시에 영남에서 호남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에 임진왜란 당시 더욱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진주성 싸움에 곤양군수 및 곤양지역의 사람들이 초미의 관심을 갖고 대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다른 지역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진주성 싸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김시민장군과 함께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은 진주성 전투를 위해 장병100명을 징발하여 진주성에 도착하고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을 끝까지 지키게 된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장군이 곤양에서 허드렛일을 시작한다. 이후 원균이 찾아와서 과거에 응시하라고 한다. 무과시험을 치루는 동안 곤양마을은 왜구들의 노략질로 피바다가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원균은 곤양으로 도망치면서 눌러 앉은 곳이 곤양읍성이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하면서 거쳤갔던 곳이 곤양읍성이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곤양에 관련된 이야기가 자주나온다. 그중 대부분이 곤양군수의 이야기 이지만....
권율 도원수가 곤양읍성 안에 도착하여 원균 통제사를 호출 대령시켰다. 권율 도원수는 육전(陸戰)이 위급한데 해전(海戰)이 출전하지 않으니 일본 보급선은 자유로이 남해안을 왕래하게 되었다는 죄책을 물어 원균 통제사에게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곤장형을 가하게 되어 볼기를 맞았다. 한산도로 가면 반드시 출전하겠다고 권율 도원수에게 다짐하고 돌아가는 원균은 이것이 순전히 이순신의 농간으로 매를 맞는 것이라고 푸념하고 충무공에게 앙심을 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부분에 관해서 불멸의 이순신에도 자세히 나오고 있다.
선조실록에 실린 곤양읍성 기록을 보면 "서기 1597년 8월 5일 왜군의 좌군은 곤양을 거쳐 하동으로 진출하였다.
서기 1598년 9월 중로제독 동일원(董一元)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이 왜군격퇴를 위하여 진주로 들어왔다. 왜군 10,000여 명은 시마즈의 지휘아래 곤양읍성과 고성읍성을 양 날개로 삼아 진주 남강에서 최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후방으로는 망진, 영춘, 사천 성채를 통양창포 신채의 전진방어기지로 삼고 있었다. 동일원군(조명연합군)은 9월 20일 야간기습전투로 왜군을 공격하였고 왜군은 곤양과 사천 쪽으로 도망을 갔다. 22일에는 곤양성을 탈환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곤양읍성과 사천, 순천, 광양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명연합군은 남강을 도하 하여 곤양을 탈환하고, 곤양 왜성을 파괴 하였습니다. (곤양왜성에 관하여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가 없네요,)그러나 일본군 진채들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명군은 일본군이 창고에 저장해둔 식량까지 불태워 버렸습니다. 또한 일본군 잔당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마을을 수색하여 백성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아녀자들을 강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남강 남쪽 지역은 명군에 의해 초토화 되다시피 되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치루면서 조선의 백성들 모두 피해를 보았죠. 이는 나라의 힘이 없을 경우 당하는 사람은 백성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알아야 겠습니다. 요즘 같이 일본과 중국이 우리의 땅 독도와 이어도를 노리고 있는 이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분명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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