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선진리왜성(선진리성)_01 왜성(倭城)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진항의 북방에 있는 이 성은 삼면이 바다에 접하고 동쪽만 육지에 닿아 있는 반도 지형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항구로 유명했으며 선진이 설치되기도 하였는데, 선진은 싸움터에서 앞장서는 군대를 뜻한다. 『읍지』와 『대동지지』의 기록을 보면 이 선진에는 전함이 1척, 병선이 1척, 하후선이 2척 있었다고 하여, 삼천진이라 불렸다. 선조 30년(1597)에 왜의 석만자가 이곳에서 지내면서 울산의 도산, 순천의 왜교와 더불어 3굴이라 불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지은 성으로, 규모나 구조면에서 볼 때 활동의 주요 근거지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순신 장군에 의해 격파 당하기도 하였다. 현재 흙으로 쌓은 성벽이 1㎞ 가량 남아 있으며, 돌로 만든 누(樓)는 무너졌으나 대체로 성의 규모대로 터가 남아 있다. <백과사전 발췌>

▼ 선진리성(선진리왜성)은 위로 사천읍성과 좌측으로는 곤양읍성을 끼고 있으며 서쪽 앞에는 사천만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아래 지도는 1872년 지방지에 나오는 사천현지도 중 선진의 모습입니다. 선진에는 향창(조선시대 군량미를 보관하여 두던 창고)과 집물고가 있었고 전선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 선진리성은 임진왜란당시 사천해전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고 정유재란 당시 조선군과 명나군의 연합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있었다.
사천읍에서 서남쪽 약 7㎞ 지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천만의 동안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구릉의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한 평산성의 토축으로 된 창성이 있었는데 이것이 선진리성이다. 그후 정유재란 당시 왜장이었던 모리길성으로 하여금 성을 구축했다는 일본 측 기록 즉, 도진가기의 영향으로 우리에게 사천 선진리왜성으로 잘 알려져있다.
▼ 고려시대때에는 통양창성으로 불리웠다가 숙종때 선진리에는 진보가 설치되었는데 전선, 병선 각 1척과 사후선 정탐선 2척이 상시 배치되어 해안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성내에는 비후당과 수전군기고 그리고 관해정 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병력으로는 수군 40주사사 및 포격 도합 156명이었다. 목태림이 쓴 동성부에 의하면 능노군 145, 포수 34, 화포수 10, 사궁 30명 등이 상주하고 영조 36년(1760)에 설치한 진주 가산창의 방어 임무뿐 아니라 수시로 부조할 때 호위를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선진리성은 일제 때 일제당국에 의해 임진란시 일본군의 전승지라 하여 관심을 끈 바 있고, 1936년 5월에는 이 성지를 고적 제81호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63년 1월 21일자로 사적 제50호로 지정되었으나 왜성이라는 이유로 다시 1998년 9월 8일자로 지방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아래 사진은 선진리성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간 길으로 이길은 차량들이 업무적으로 갈 수 있게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저는 모르고 이길로 올라갔습니다.
▼ 조금 올라가는 선진리왜성의 모습이 보이는데 보는 순간 일본 왜성의 특유의 모습이 보입니다.
▼ 왜성의 축성방식은 조선의 읍성이나 진성, 도성, 산성들과 달리 경사가 15도 이상 각을 주어서 만들어져 있으며 모서리가 있는 곳은 90도로 각이 꺽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 우리나라의 산성이나 읍성등이 90도 가까운 정도의 성벽이라면 일본 왜성의 경우 60~80도 정도 경사를 두어 적이 성벽을 타고 넘어오지 못하게한 것으로 보입니다.
▼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읍성의 경우 성문을 찾기가 쉽지만 일본 왜성의 경우 성문을 찾기 위해서는 수많은 희생을 치룬다는 것입니다. 이는 적의 기병이나 보병이 직선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으면서 동시에 접근하는 적의 속도를 떨어뜨려 방어를 쉽게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성문 입구까지 들어온 적은 최소한 세 방향에서 협공을 받게 되는데 선진리성도 똑 같은 구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성의 경우 가장 높은 지역의 본진과 그 다음의 제2구역, 그리고 제일 낮은 지대의 제3구역으로 나뉘는데, 그 각각의 구역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진리성의 경우 본진과 함께 2제 구역만 있는 것 같습니다.
▼ 왜성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입구를 ㄱ자로 꺽어 협로를 만들어서 공격군을 괴롭힙니다. 왜성은 외성,중성,내성 등의 여러겹의 방어선을 만들면서 내부를 여러 좁은 구획으로 나누고 좁은 통로를 만들어서 적을 괴롭힙니다. 일종의 함정이기도 하면서 길을 따라 가다보면 막다른 길이 나오는 방식으로 성을 설계하였다고 합니다.
▼ 이곳이 사천해전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거북선모양의 화장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 일본 왜성의 특징을 보면 소규모의 병력으로 대병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높은 언덕에 계단식으로 점점 높게 쌓는데 약간 비스듬하게 쌓다가 수직으로 쌓습니다. 성벽의 맨 위에는 성벽에 돌출되게 건물을 지어 건물 안에서 활이나 조총으로 방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의 입구는 ㄷ자 형태로 좁게 지어 적이 침입하면 항상 2~3개 방면에서 조총을 쏘아 효과적으로 수비가 가능합니다.
▼ 거북선 모양을 현대적으로 바꾸어 놓은 화장실로 조금 특이하게 보이더군요. 아무래도 이곳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했던 것을 알려주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 같습니다.
▼ 일본식 성은 우선 방어의 극대화에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동산형태의 지형에 성벽을 3~4겹씩 층을 지어 쌓습니다. 성벽은 기단은 비스듬히 쌓다가 나중에는 수직으로 쌓고 성벽 끝부분을 따라 건축물을 올려 공격군이 성벽을 타고 넘기가 어렵도록 만듭니다.
▼ 이제 선진리왜성 성문을 향해 들어갑니다. 양쪽에서 왜군의 조총과 화살이 수없이 날아오는 느낌이 듭니다. 왜성의 경우 적이 곧바로 성으로 접근 할 수 없도록 성 입구가 몇 번 꺾여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곳 선진리왜성도 그런 왜성의 기본에 충실합니다.
▼ 히메지성을 보면 성곽위에 성벽끝에 건축물을 지어 놓았는데 선진리성에서는 규모를 너무 작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조선 산성의 경우 성벽 위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비해 왜성의 경우 성벽 위에는 목조 구조물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 기와의 문양도 일본식의 문양을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 조총을 발사하기위한 총혈이 보입니다. 여기 뒤에서 조총으로 빵빵하고 쏘겠죠.
▼ 일본성의 경우 출입구는 반드시 "ㄷ"자 형태 꺽어지게 만들어서 공격군이 들어올 경우 3개의 방향에서 조총으로 방어 합니다. 고구려 성의 장점인 치, 옹성을 적절이 섞어 넣어 소수의 병력으로도 수성을 가능하게 발전시켰습니다.
▼ 성문을 복원한 것으로 2005년 발굴조사와 2006년 성벽보수 공사중 발견된 4개의 기둥받침돌과 2개의 기둥구멍을 기초로 했고 일본의 히메지성의 성문 형태를 참고하여 복원하였습니다.
▼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성벽을 따라 건물을 짓고, 성벽을 여러 겹으로 짓기 때문에 성 자체를 크게 짓기가 어렵습니다. 또 우리나라 산성처럼 넓지 않기 때문에 우물 등 식수 확보가 상대적으로 취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성의 경우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포위공격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 일본 왜성의 경우엔 모서리를 깍아서 각을 세워 맞추고 있다. 그리고 돌의 크기도 다른 부분보다 큰 바위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성곽과 틀린 부분이다고 볼 수 있다.
▼ 선진리성안에는 공연을 하기위한 공연장이 설치가 되어있는데 봄에 하는 벗꽃축제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 임진왜란 당시 울산왜성 전투시 왜군이 조명연합군과 대치시 방어에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식수와 식량 확보에는 상당한 애로를 겪었다고 합니다. 계속되는 농성전으로 왜군들은 갈증과 굶주림, 그리고 추위에 거의 아사 직전의 상태까지 몰렸다고 합니다. 나고야 박물관에 있는 울산성 전투도를 보면 말을 잡아 그 피를 빨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식량 부족이 심화되자 조총병과 일반 검수에 대해 식량을 차등 지급 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처절 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합니다.
▼ 선진리성은 고려의 토성 위에 그대로 돌을 쌓아 올렸다. 성을 급하게 쌓았다는 증거이다. 이유를 보면 선진리왜성을 쌓음으로써 일본군은 진주와 남강을 통해 내륙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 보이는 숲에서 올라오는 길이 선진리왜성의 주출입구입니다.
▼ 울산왜성의 경우 성벽은 최저 4미터에서 최고 14미터, 가장 높은 곳은 약 5층 높이였다고 합니다. 여기 있는 선진리성은 왜성을 복원하면서 왜성처럼 보이기 위해서 축성하였지만 높이 지으려고 하면 복원할 돈이 많이 들기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선진리성에서 바라본 야산으로 상당히 가파르게 조성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덴슈카쿠(천수각)까지 가기위해서는 이 성벽을 뚫고나서 이와 비슷한 성벽을 무너뜨려야 갈 것입니다.
▼ 여기서 복원하면서 성곽의 높이를 1미터 정도 높게 쌓아 복원하였습니다. 선진리 벗꽃축제때에는 벗꽃이 장관을 이룹니다.
▼ 성곽의 축성은 큰 돌에 작은돌을 틈사이에 메꾸는 방식으로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편에는 천수각까지 가는 길과 함께 선진리왜성의 구조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히메지성의 구조에 관하여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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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팬저의 국방여행 : 경남 백의종군로 사업1 2009-08-08 10:58:41 #

    ... 승전탑 하나만 있는데 이런 부분은 놓아두고 많은 돈을 들여서 임진왜란 수난사를 짓는 것도 조금은 아쉽고 선진리성 바로 옆에 있는 조명연합군의 귀무덤이 있는데(조명군총) ....사천 선진리성1사천 선진리성2사천 조명군총또 하나는 합천의 초계지역의 권율도원수를 만났던 곳을 기념하여 초계 관아를 복원한다고 합니다. 아직 뉴스에는 안나왔는데요. 합천군의회에서 다루 ... more

덧글

  • 유진우 2008/07/18 17:19 # 삭제

    복원하려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애매하네요. 특히 성문 우측의 성벽을 보면 원래는 이보다 더 높아야 정상인데 말이죠( 쌓다 마는 통에 목조 구조가 그대로 노출되니 )
    역시 서생포 왜성이 서둘러 복원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동안 우리 사극에 등장하는 왜성을 보면 참으로 진주성 등 조선의 산성과 읍성을 그대로 활용해 고증 오류를 제대로 보여줬으니 서둘러 제대로 된 왜성이 나와야 할 듯
  • 팬저 2008/07/19 00:15 #

    선진리왜성의 경우 일본인 관광객들을 위해 분위기 상 복원한 것 같습니다. 다만 말씀하신 것 처럼 높이를 작게한 것은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벗꽃 때문인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아무래도 벗나무에 걸려서 저런식으로 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고.. 아니면 지자체에서 예산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유진우 2008/07/18 17:23 # 삭제

    다이묘의 거성이 아닌 이상 그다지 크게 축성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것입니다. 보통 우리 산성이나 읍성은 전시 성 밖의 농민 및 백성들까지 수용해야 하기 때문에 성벽을 그저 담장형태로 크게 두르는 수 밖에 없지만 일본은 가신들과 그 가솔들만이 입성해 농성전을 전개하기 때문에 굳이 크게 수축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작으면 작을 수록 방어력이 극대화되고 그만큼 수비할 공간이 줄어드니까요
    실제 다이묘의 거성( 居城 )격인 오사카성이나 구마모토성, 오다와라성, 에도성, 슨푸성 등 둘레가 4~9km에 이르는 성들은 보통 축성하는데만 6~7년씩 걸렸습니다. 무엇보다 쉴새없이 적을 맞아 싸워야하는 판이니 축성 공사 기간 및 비용이 적게 드는 규모가 작은 성이 인기가 있었겠죠
  • 유진우 2008/07/18 17:32 # 삭제

    일본성을 포위만 한다해서 다는 아닙니다. 일본성이 그토록 방어의 극대화에 치중한 것은 물론 농성을 오래하기 위함도 있지만 바로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측면도 큽니다.
    물론 공성측의 병력이 너무 압도적인 경우에는 구원이 실패할 경우도 많았습니다만( 대표적인 사례가 다케다 신겐군의 쓰쿠데, 후타마타, 노다성 공성, 다케다 가쓰요리의 다카텐진성 수성 실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빗추 다카마쓰성 수공, 오다와라성 포위, 도리이 모토타다의 후시미성 수성전 등등 )
    울산왜성 함락에 실패한 원인은 일단 조명 연합군이 충분한 공성준비 없이 바로 공성에 돌입한 점, 그리고 월동준비 등에서 취약했던 점( 오죽하면 아군 진영에서 동사자가 발생하니 ),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우키다 히데이에, 모리 히데모토,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등 다른 다이묘들의 원군이었습니다. 이들이 조명연합군을 역포위해 조·일전쟁판 "천왕성 작전"을 펼치기 직전 간신히 조명연합군이 퇴각해 몰살을 피했죠
  • 팬저 2008/07/19 00:21 #

    울산왜성의 왜군들이 힘든 것은 우물 즉 식수의 부족이 가장 큰 이유고 그다음은 배고픔이겠죠.
  • 유진우 2008/07/18 17:34 # 삭제

    개인적으로 덴슈카쿠는 기대도 안합니다( 철근/콘크리트로 복원한다하더라도 예산 문제에, 향토 사학자들의 반발이 클테니까요 ) 혼마루 고톈이나 산노마루의 정문, 야구라( 평시에는 창고로 이용하다 전시에는 벙커로 운용 ) 등이라도 제대로 복원하길 바랄 뿐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영지인 규슈 가고시마의 쓰루마루성을 참고하면 어느 정도 고증 문제를 해결할 듯 하네요
  • 안성현 2008/09/19 12:47 # 삭제

    사천 선진리성 발굴조사를 담당한 사람입니다. 선진리 성에 대한 궁금한 점이 있으며, 메일 주세요^^*
    ansh70@hanmail.net
    그리고 복원한 부분은 선진리 왜성의 본환 부분으로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 팬저 2008/11/20 10:47 #

    언제 연락을 한번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김기용 2009/07/28 13:30 # 삭제

    본환이 뭔가 한참 고민했네요^^; 혼마루가 한자로 본환(本丸) 였죠?
  • 팬저 2009/07/28 16:02 #

    본환을 일본어로 하면 혼마루가 됩니다. ^^
  • 여산 2009/08/14 11:37 # 삭제

    내용 중 십물고 -> 집물고가 맞습니다.
  • 팬저 2009/08/15 02:02 #

    수정했습니다.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
  • 한라온 2021/02/08 16:06 #

    네이버에서 활동하시는 아케치경감 님의 글을 읽어보니, 하필이면 선진리성을 복원할 때 참고한 히메지 성의 건축양식이 다른 성에 비해 독특하여 전시상황의 성에는 맞지 않는, 잘못된 복원이라고 하더군요.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lmi&logNo=220927440217&proxyReferer=https:%2F%2Fm.cafe.naver.com%2Fca-fe%2Fweb%2Fcafes%2F10758331%2Farticles%2F145300%3Fmenuid%3D103%26query%3D%25EC%2582%25AC%25EC%25B2%259C%25EC%2599%259C%25EC%2584%25B1%26art%3DaW50ZXJuYWwtY2FmZS1hcnRpY2xlLXJlYWQtaW5DYWZlLXNlYXJjaC1saXN0.eyJ0eXAiOiJKV1QiLCJhbGciOiJIUzI1NiJ9.eyJjYWZlVHlwZSI6IkNBRkVfSUQiLCJhcnRpY2xlSWQiOjE0NTMwMCwiaXNzdWVkQXQiOjE2MTI3Njc5ODg1MzUsImNhZmVJZCI6MTA3NTgzMzF9.OEnZy3pI2Al-IH1K8ohg9XtgY6RQ4eM3pk1XO6uTPOg
  • 팬저 2021/02/08 18:28 #

    일단 이케치경감님의 글이 맞을 수 있습니다. 원래 복원이라는 것은 상상으로 축성하거나 다른 곳에 만들어진 곳을 참고하는데 사천왜성인 선진리왜성은 히메지성을 참고할 가망성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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