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진항의 북방에 있는 이 성은 삼면이 바다에 접하고 동쪽만 육지에 닿아 있는 반도 지형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항구로 유명했으며 선진이 설치되기도 하였는데, 선진은 싸움터에서 앞장서는 군대를 뜻한다. 『읍지』와 『대동지지』의 기록을 보면 이 선진에는 전함이 1척, 병선이 1척, 하후선이 2척 있었다고 하여, 삼천진이라 불렸다. 선조 30년(1597)에 왜의 석만자가 이곳에서 지내면서 울산의 도산, 순천의 왜교와 더불어 3굴이라 불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지은 성으로, 규모나 구조면에서 볼 때 활동의 주요 근거지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순신 장군에 의해 격파 당하기도 하였다. 현재 흙으로 쌓은 성벽이 1㎞ 가량 남아 있으며, 돌로 만든 누(樓)는 무너졌으나 대체로 성의 규모대로 터가 남아 있다. <백과사전 발췌>
▼ 선진리성(선진리왜성)은 위로 사천읍성과 좌측으로는 곤양읍성을 끼고 있으며 서쪽 앞에는 사천만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천읍에서 서남쪽 약 7㎞ 지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천만의 동안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구릉의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한 평산성의 토축으로 된 창성이 있었는데 이것이 선진리성이다. 그후 정유재란 당시 왜장이었던 모리길성으로 하여금 성을 구축했다는 일본 측 기록 즉, 도진가기의 영향으로 우리에게 사천 선진리왜성으로 잘 알려져있다.
▼ 고려시대때에는 통양창성으로 불리웠다가 숙종때 선진리에는 진보가 설치되었는데 전선, 병선 각 1척과 사후선 정탐선 2척이 상시 배치되어 해안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성내에는 비후당과 수전군기고 그리고 관해정 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병력으로는 수군 40주사사 및 포격 도합 156명이었다. 목태림이 쓴 동성부에 의하면 능노군 145, 포수 34, 화포수 10, 사궁 30명 등이 상주하고 영조 36년(1760)에 설치한 진주 가산창의 방어 임무뿐 아니라 수시로 부조할 때 호위를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선진리성은 일제 때 일제당국에 의해 임진란시 일본군의 전승지라 하여 관심을 끈 바 있고, 1936년 5월에는 이 성지를 고적 제81호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63년 1월 21일자로 사적 제50호로 지정되었으나 왜성이라는 이유로 다시 1998년 9월 8일자로 지방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아래 사진은 선진리성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간 길으로 이길은 차량들이 업무적으로 갈 수 있게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저는 모르고 이길로 올라갔습니다.
▼ 조금 올라가는 선진리왜성의 모습이 보이는데 보는 순간 일본 왜성의 특유의 모습이 보입니다.
▼ 왜성의 축성방식은 조선의 읍성이나 진성, 도성, 산성들과 달리 경사가 15도 이상 각을 주어서 만들어져 있으며 모서리가 있는 곳은 90도로 각이 꺽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 우리나라의 산성이나 읍성등이 90도 가까운 정도의 성벽이라면 일본 왜성의 경우 60~80도 정도 경사를 두어 적이 성벽을 타고 넘어오지 못하게한 것으로 보입니다.
▼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읍성의 경우 성문을 찾기가 쉽지만 일본 왜성의 경우 성문을 찾기 위해서는 수많은 희생을 치룬다는 것입니다. 이는 적의 기병이나 보병이 직선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으면서 동시에 접근하는 적의 속도를 떨어뜨려 방어를 쉽게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성문 입구까지 들어온 적은 최소한 세 방향에서 협공을 받게 되는데 선진리성도 똑 같은 구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성의 경우 가장 높은 지역의 본진과 그 다음의 제2구역, 그리고 제일 낮은 지대의 제3구역으로 나뉘는데, 그 각각의 구역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진리성의 경우 본진과 함께 2제 구역만 있는 것 같습니다.
▼ 왜성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입구를 ㄱ자로 꺽어 협로를 만들어서 공격군을 괴롭힙니다. 왜성은 외성,중성,내성 등의 여러겹의 방어선을 만들면서 내부를 여러 좁은 구획으로 나누고 좁은 통로를 만들어서 적을 괴롭힙니다. 일종의 함정이기도 하면서 길을 따라 가다보면 막다른 길이 나오는 방식으로 성을 설계하였다고 합니다.
▼ 이곳이 사천해전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거북선모양의 화장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 일본 왜성의 특징을 보면 소규모의 병력으로 대병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높은 언덕에 계단식으로 점점 높게 쌓는데 약간 비스듬하게 쌓다가 수직으로 쌓습니다. 성벽의 맨 위에는 성벽에 돌출되게 건물을 지어 건물 안에서 활이나 조총으로 방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의 입구는 ㄷ자 형태로 좁게 지어 적이 침입하면 항상 2~3개 방면에서 조총을 쏘아 효과적으로 수비가 가능합니다.
▼ 거북선 모양을 현대적으로 바꾸어 놓은 화장실로 조금 특이하게 보이더군요. 아무래도 이곳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했던 것을 알려주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 같습니다.



▼ 일본식 성은 우선 방어의 극대화에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동산형태의 지형에 성벽을 3~4겹씩 층을 지어 쌓습니다. 성벽은 기단은 비스듬히 쌓다가 나중에는 수직으로 쌓고 성벽 끝부분을 따라 건축물을 올려 공격군이 성벽을 타고 넘기가 어렵도록 만듭니다.


















일본 히메지성의 구조에 관하여 알아보기
덧글
역시 서생포 왜성이 서둘러 복원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동안 우리 사극에 등장하는 왜성을 보면 참으로 진주성 등 조선의 산성과 읍성을 그대로 활용해 고증 오류를 제대로 보여줬으니 서둘러 제대로 된 왜성이 나와야 할 듯
실제 다이묘의 거성( 居城 )격인 오사카성이나 구마모토성, 오다와라성, 에도성, 슨푸성 등 둘레가 4~9km에 이르는 성들은 보통 축성하는데만 6~7년씩 걸렸습니다. 무엇보다 쉴새없이 적을 맞아 싸워야하는 판이니 축성 공사 기간 및 비용이 적게 드는 규모가 작은 성이 인기가 있었겠죠
물론 공성측의 병력이 너무 압도적인 경우에는 구원이 실패할 경우도 많았습니다만( 대표적인 사례가 다케다 신겐군의 쓰쿠데, 후타마타, 노다성 공성, 다케다 가쓰요리의 다카텐진성 수성 실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빗추 다카마쓰성 수공, 오다와라성 포위, 도리이 모토타다의 후시미성 수성전 등등 )
울산왜성 함락에 실패한 원인은 일단 조명 연합군이 충분한 공성준비 없이 바로 공성에 돌입한 점, 그리고 월동준비 등에서 취약했던 점( 오죽하면 아군 진영에서 동사자가 발생하니 ),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우키다 히데이에, 모리 히데모토,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등 다른 다이묘들의 원군이었습니다. 이들이 조명연합군을 역포위해 조·일전쟁판 "천왕성 작전"을 펼치기 직전 간신히 조명연합군이 퇴각해 몰살을 피했죠
ansh70@hanmail.net
그리고 복원한 부분은 선진리 왜성의 본환 부분으로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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