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소을비포(소비포)진성_02 진성(鎭城)



저번에 한번 고성 소을비포진성에 관하여 글을 올렸는데요. 그때는 재단법인 동아문화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하는 내용에 관해서 올렸습니다. 이번에 복원된 소을비포진성을 직접 찾아가 보았습니다. 소을비포진성은 경남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에 있습니다만 찾아가기가 쉽지만 않습니다.(고성 공룡박물관을 찾아와서 하이면을 찾는다면 편할 것 같습니다.)
▼ 고성군을 찾아가서 가거나 삼천포에서 찾아가는 것이 편합니다. 다만 이정표가 없어서 찾아가기가 쉽지가 않았고요. 네비게이션에도 표시가 되지 않아서 더 더욱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소을비포(소비포)진성은 뒤로 보이는 좌이산이 진산이고 리아스식해안으로 되어 있기도 하지만 자그마한 만형식의 포구로 형성되어 있어서 선박들이 정박하기 좋아보입니다.
▼ 1872년 지방지에 나타난 소을비포(소비포)진성으로 동헌과 객사등의 각종 관아 건물들이 보입니다. 진성의 성곽은 많이 허물어져있고 성문은 없어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만 북쪽은 성곽의 여장이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측은 그림지도에서 좌측인데 북측에 각종 선박들이 정박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 아래 그림 지도는 이순신함대가 임진왜란 당시 1차 원정당시 여수서 출발하여 지나간 항로입니다. 그 항로 당시 소을비포진성에서 함대가 숙영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을비포(소비포)진성 답사에 관해서는 2편으로 나누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고성 소을비포(소비포)진성이 있는 곳은 행정구역으로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로 뒷산의 좌이산에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던 것을 알려주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마을 입구에 봉수대 모양의 이정표가 있습니다.
▼ 마을 입구 에서 유일하게 본 소을비포성지 표지판(고성 공룡박물관에서 유람선 선착장을 찾아오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 도로에서 본 소을비포진성의 모습으로 제가 찾아 갔을때는 민물때 였습니다. 나즈막한 언덕에 있는 소을비포진성은 아담하게 있어서 그런지 편안하게 보입니다.
▼ 소을비포진성의 북문이 보입니다. 소을비포진성 안내판에는 산성이라고 하던데 산성이라고 부르기는 부끄러울 정도로 해안가에서 높이가 대략 20미터도 되지 않습니다. 남문근처는 10여미터도 되지 않습니다.
▼ 소을비포진성입구에서 본 동화리 포구입니다. 조그마한 만이라 그런지 파도도 잔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앞쪽에는 나즈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서 태풍이나 강한 바람을 피하기 좋은 포구처럼 보입니다.
▼ 새롭게 복원된 소을비포진성의 치성부근입니다. 치성에 관해서는 2편에서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 새롭게 복원된 소을비포진성은 체성과 여장부분은 석재를 달리하여 한눈에 알아보기 좋게(?)해 놓았더군요.
▼ 진성 성문까지 바닥에 돌을 갈아 놓아 비가 올 경우 이동하기 편하게 되어있더군요.
▼ 고성 소을비포성지를 안내하는 안내판으로 예전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뒷편에 소을비포진성 관련 큰 안내판이 있습니다. 안내판을 보면 조선전기 관방성이라고 나오는데 관방성이란 관리가 거주하면서 행정을 보던 성을 관방성이라고 부르는데 진성이라 읍성들은 거의 관방성이라고 보면 됩니다.
▼ 성문근처의 성곽과 체성부근의 성곽의 다른 석재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는 사진으로 여장에 총안과 타가 있는데 왜? 이렇게 다른 석재를 사용하여 진성을 복원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화강석을 사용한 여장부근을 보면 면도칼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성돌과 성돌사이가 틈이 없어보입니다만 체성부근은 틈이 보입니다. 예전에 과연 이런 화강석을 이용하여 성곽을 만들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돈을 들여서 복원하면서 왜 이런 화강석을 이용하여 만들었을까요?
▼ 성문정면으로 읍성과 달리 진성은 성문이 작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읍성은 주민들과 생활하는 것도 있고 행정적으로 중요한 역활을 하는 이유때문에 성문이 큰 것 같고 진성은 오로지 군사요충지로서의 역활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누각의 초석으로 예전에 사용한 초석인지 아니면 새롭게만든 초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러운 초석을 보니 예전부터 있었던 초석을 복원하면서 사용한 느낌을 받습니다. 위와 같은 모양의 초석을 덤벙주초라고 하는데요 초석상면을 가공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자연석을 그대로 초석으로 사용한 것을 말하며, 초석상면이 고르지 않아 초석간의 수평이 맞지 않게 놓여져 덤벙주초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다듬어서 사용한 초석을 정평주초라고 한다고 합니다.
▼ 성문을 닫을때 밀리지 않게끔 하는 돌이 있는데 이 명칭을 모르겠더군요. 아시는 분은 글 좀 남겨주세요.
▼ 성문에는 철엽을 달아서 화공에 대비한 것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김해읍성과 달리 철엽을 검정색으로 칠해서 그런지 좀 더 실전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 소을비포진성의 협축으로 화강석으로 놓아서 그런지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성곽 같습니다. 협축은 무사석으로 네모 반듯하게 놓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일단 들어와서 보니 예전에 사용한 각종 관아 건물은 보이지 않고 건물터에 초석만 있습니다.
▼ 북문의 누각은 현판이 없었는데 진성의 경우 현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가 없네요. 그리고 누각은 평거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성문의 뒤편으로 문을 걸어두는 것의 명칭도 모르겠더군요. 성문뒤에 있는 가운데 나무로된 걸이는 장군목이라고 하네요.
▼ 북문누각을 오르기 위해 계단을 올라갑니다. 계단 또한 화강석으로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단 옆에 있는 막아낸돌을 소맷돌이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 누각의 안의 모습으로 새롭게 단청도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누각에서 본 동화리 포구의 모습입니다.
▼ 여장의 모습으로 한치의 틈도 없이 만들어 놓아서 그런지 이질감이 드는 것은 저만의 감정일까요?
▼ 근총안과 원총안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찍었는데 잘 나타나지가 않네요. 여장또한 벽돌식의 수원화성과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여장 뒤에 보이는 산이 좌이산으로 봉수대가 있었던 곳으로 좌이산 봉수대에서 이곳 소을비포진성으로 연결이 됩니다.
▼ 북측누각의 북동측편 체성으로 체성의 회각로는 3미터정도 되어 보입니다. 성벽의 높이는2미터~2.5미터 정도 되어보였습니다. 발굴조사 자료에 의하면 성벽의 높이는 3미터 되었다고 하더군요.
▼ 동편성곽으로 동편성곽의 높이는 1.3 미터도 되지 않게 조성이 되어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더군요. 왜 저렇게 낮게 복원했을까요?
▼ 누각의 처마의 모습입니다.
▼ 조선시대때의 자료를 기준으로 보면 좌측 앞쪽에 보이는 곳이 객사이고 뒤쪽이 동헌입니다. 우측 앞쪽은 잘모르겠네요.
▼ 남서쪽 체성을 따라서 움직여 봅니다. 이곳은 바로 바닷가와 가까이 있는 곳이라 경사가 완만하지가 않습니다.
▼ 남서쪽 체성의 모습중 성벽의 높이를 알아보고자 찍었는데 실패한 사진입니다. ㅠㅠ
2편에서는 서편과 동편성곽에 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덧글

  • baeysoon 2008/07/14 21:41 #

    소을 비포진성 다녀오셨군요. 팬져님 덕분에 저곳을 알게되었는데요. 이렇게 또보니 한번 다녀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문부근을 대리석으로했나요? 화강암같이 보이는데요...대리석이라면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경상좌수영진성,밀양읍성,김해읍성 문...가보고 싶네요.
  • 팬저 2008/07/14 22:21 #

    화강암이 맞을것 같네요. 저도 석재명을 몰라서 그냥 대리석으로 했습니다. ^^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소비포 진성을 가면서 간곳이 사천읍성과 곤양읍성 그리고 선진리성인데 사천읍성과 선진리성은 인터넷에 많이나오지만 곤양읍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갔었는데 너무 힘이 들었지만 보람은 느낍니다. 소비포부터 올리고 선진리, 사천읍성, 곤양읍성식으로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 유진우 2008/07/18 17:48 # 삭제

    비싼 화강암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래도 성곽 복원에 사용하는 석재들 중에서는 비교적 구하기가 쉬운 탓도 있고 일단 화강암의 때깔이 워낙 좋다보니 돈들인 보람 느끼게 하기( 일단 좀 보기가 좋아야 추가적으로 예산 확보 등등 )에도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주변의 석재들을 가공해 복원해 놓고 보면 뭔가 투박한 감이 들지만 깔끔한 화강암이라면 일단 보기에도 좋고 단정한 감이 있으니까요
    뭐 저로서는 워낙 이런 복원 성곽이나 성문에 익숙하고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탓이라 그런지 공사기간 단축, 공사 비용 절감, 외관의 미적인 요소 등에서 어느 정도 이런 방식에 공감을 합니다.
  • 팬저 2008/07/19 00:10 #

    70년대 부터 복원한 진주성의 경우 아직도 성곽의 모습이 어색하게 보이더군요. 경비나 공사비용과 기간 단축에 대해서는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뭐라고 답변드리기는 뭐합니다만 화강석을 이용하는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복원 방법도 유행이 있는 것 같습니다. 70~90년대에는 화강석으로 2000년대에는 자연스런운 방식의 돌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 유진우 2008/07/18 17:55 # 삭제

    3m라... 진성이라 그런지 성벽이 좀 낮네요.
    아마 조·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우리 읍성이나 진성, 산성을 보고 비웃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단순하게 고을을 둘러싼 담장형태의 성인데 성벽이 저렇게 낮아서야 어찌 방어하겠느냐? 며 말이죠 )
    일본성의 경우 가장 낮은 산노마루의 경우 3~4m 정도지만 니노마루, 혼마루에 이르면 16m 이상은 되니 말이죠( 구마모토성 혼마루의 경우 성벽 30m, 덴슈카쿠의 축대만 10m가 넘었으니 )
    성벽이 돌파되면 그야말로 끝장인 조선의 읍성이나 진성, 산성이니( 그래서 그런지 남원성 전투 직전 조명군이 열심히 성벽을 5m 이상으로 높여 쌓고 해자를 더욱 깊게 판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진주성 전투 때는 호소카와 다다오키군 등이 쌓은 토산과 산대에 대응해 수성군도 토산을 쌓아올렸으니 ) 성벽이라도 좀 높게 쌓았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물론 화포와 화약 등 중화기를 충분히 배치한 연안성, 진주성,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일본군을 맞아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말이죠
  • 팬저 2008/07/19 00:12 #

    선조도 일본의 왜성의 장점을 보고 배워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일본도 조선의 읍성의 기능을 보고 배웠다고 합니다. 전투를 치루면서 서로에게 배울 것은 배웠던것 같습니다.
  • 유진우 2008/07/19 07:48 # 삭제

    저는 여장을 보는 순간, 강화도 광성보의 용두돈대인 줄 알았죠. 저렇게 화강암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벽돌을 구워 쌓는 것이 더욱 공사비용을 절감하는 방법인데 말이죠. 그랬다가는 남한산성이나 강화도의 각 진, 강화산성의 느낌이 날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6~70년대 복원된 홍주성이나 풍남문, 영남제일문( 대구성 남문 ), 진주성, 춘천 봉의산성, 덕주산성 남문, 강화도의 주요 진, 보 등은 화강암을 많이 사용해 비교적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기는 합니다.
    드라마 촬영할 때 화면 시각적으로도 보기 좋았을 것이고 실제 수원화성이나 광성보 등이 "찬란한 여명" 등 대하드라마 촬영지로 인기였죠. 비교적 최근에 복원된 독용산성 동문 등도 부분적으로 화강암과 벽돌을 이용해 말끔하게 단장했습니다( 물론 옛 돌과의 위화감이 없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러워 질 듯 합니다 )
  • 팬저 2008/07/19 10:58 #

    세월이 지나가고 나면 자연스러운 맛은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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