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 그 비밀을 찾아서_03 읍성(邑城)



▼ 이제 낙안읍성의 성벽이 조선시대부터 온전히 잘 보존되고 있는 서문에서 남문방향으로 갑니다. 아래 사진에 나오는 남문인 쌍청루가 보이네요.
▼ 걸어오다가 서문방향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조금은 내리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 중간에 보니 조랑말이 방목을 해놓았는지 3마리가 자연스럽게 놀고(?)있더군요.
▼ 미석의 모습이 보여서 찍은 사진으로 남문측의 성곽의 높이는 북문과 달리 조금 낮아 보였습니다.
▼ 낙안읍성은 평지성인데 남측성곽인 이곳만 조그마한 언덕위에 있습니다.
▼ 낙안읍성 사진을 찍으면 많이 찍는 지점인데 카메라 세팅이 잘못되어 있는줄도 모르고 찍다보니 하늘이 다 날라갔네요.
▼ 조선시대때 성안에는 평민이나 시장,대장간 등이 있었고 양반들은 성밖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곳 낙안읍성의 기준이 아니고 일반적인 조선의 읍성의 기준입니다. 읍성안에는 관아들 말고는 거의 초가집이었는데 넓은 농토를 가진 양반들은 읍성 바깥에 자신의 농토 가까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양지 바르고 경치도 좋은 곳에 기와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 남측성곽 또한 여장이 없었는데 계단부분은 계단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여장아닌 여장이 설치된 것처럼 되어 버렸네요. 회각로는 여기도 시멘트로 포장을 해버렸네요.
▼ 제가 찾아갔을때에는 6월이라서 그런지 밤꽃냄새가 진동을 하더군요. 낙안읍성이 여러 읍성중 가장 각광을 받는 이유가 실지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기때문일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고창읍성은 평산성의 구조도 있어서 민가가 들어설 곳이 없는 이유고 진주성은 예전에 있었던 민가들을 다 철수 시키는 바람에 팥이 들어가지 않는 진빵처럼 보이기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전 조선시대때 우리선조들의 모습은 어떻했을까 하는 마음에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 돌담과 함께 산과 함께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초가집들입니다. 읍성안에는 기와집을 지을 수 있는 공간도 없는 이유도 있지만 부임한 수령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양반들은 성 바깥에 있었던 이유도 있었다고 합니다.
▼ 바같의 모습으로 낙안벌판과 초가집이 포근해 보입니다. 특히 중앙에서 큰 벼슬을 하다고 낙향한 양반들은 수령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읍성 밖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 끼리 양반촌을 이루고 살면서 양반문화를 즐겼으며, 필요할 때만 읍성 안의 나들이 하였다고 합니다.
▼ 이제 남문인 쌍청루가 보입니다. 쌍청루는 조선시대때 진남루였는데 지금은 쌍책루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때 성안 주민이 죽으면 남문을 통해서 상여가 나갔다고 합니다. 남문은 바다와 가깝게 때문에 왜적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하여 중요한 역활을 하기 위해 남문이 주출입문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이 되며 조선시대때 사용한 진남루란 병영을 겸한 읍성인 경우 진남루,진서루,진북루와 같이 진자를 넣거나 수성루,감성루와 같이 성을 지킨다는 뜻을 부쳤다고 합니다.
▼ 낙안읍성의 초가집의 센스로 에어콘 실외기를 이런 대나무로 막아놓아 이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 수 없게 해놓았더군요. 읍성안의 큰 집은 대부분 아전들의 집이었는데 이유는 날마다 출근해야 하니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하는 이유도 되겠죠.
▼ 화장실과 사릿문. 담이 낮아서 친구들과 놀고 싶을때 담장너머로 친구야 놀자하면 친구들이 뛰쳐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 쌍청루에 오자 주위에 여장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남문은 풍수지리상 여름으로 벌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곳 남문을 지나서 낙안읍성안으로 지나갑니다. 남문은 전투시 전투지휘소가 되고 동문이나 서문은 전투지휘소에서 전달하는 내용에 따라 움직였다고 봐야 겠습니다.
▼ 여장에는 담쟁이 나무가 자라서 여장을 덮고 있어서 멋스러움이 피어 나는 것 같습니다. 낙안읍성은 임진왜란때 군수와 군사들이 관아를 비우고 충무공을 따라 해전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읍성은 무법천지가 되어서 일부 주민들이 관아를 습격하여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고 합니다.
▼ 남문의 옹성의 회각로의 모습으로 옹성의 여장의 높이는 1미터 정도 되어 보입니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퇴각하던 왜군들이 낙안에 집결하여 목책을 치고 장기전을 펼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또 왜군들의 약탈과 함께 민가에 불을 지르고 하는 탓에 주민들이 피난길에 올라 낙안읍성이 한때 폐허가 되었다고 합니다.
▼ 쌍청루의 모습으로 이 누각 또한 복원을 하였습니다. 지금의 남문의 모습은 조용하고 동문이 주 성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조선시대때에는 남문이 주 성문이었습니다. 군수의 행차나 신임군수가 발령을 받고 이 남문이 쌍청루로 오게 됩니다.
▼ 쌍청루의 육축 또한 아주 작은 성돌로 축성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초석또한 사각형 반듯한 화강석으로 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남문 옹성에서 바라본 남측성곽입니다. 동학혁명때에는 고흥,보성,순천 일대의 동학군들이 모여 피해가 컸다고 합니다. 낙안읍성을 점령한 동학군들은 이교청에 들어가 평소에 농민들을 수탈하던 아전(이,호,예,병방 등 6방)들을 징계했다고 합니다. 불탄집이 194호나 되었고, 빼앗긴 소가 55마리, 빼앗긴 재물이 50여 바리가 되었다고 합니다.(촐처 한국의 읍성 허경진 글)
▼ 남측성곽과 해자의 모습으로 해자의 폭이 3미터 정도 되어 보입니다.
▼ 남측성곽의 여장의 모습으로 여장은 8타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 쌍청루의 누각의 현판과 옹성의 여장의 모습으로 여장의 축성방법이 예전 담을 쌓는 방식처럼 보입니다.
▼ 조선시대때 가장 번화한곳이 바로 남문에서 동헌으로 연결되는 간선도로인데 지금은 동문중심으로 이루어져서 그런지 조금은 한가합니다. 읍성안에는 동헌,객사 등의 기본적인 관아가 있었는데 고을의 등급에 따라 종류가 더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다. 동문과 서문을 이어주는 큰길이 가운데 있고 그위쪽에 관아가 아래쪽에 시장과 민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낙안읍성은 위에서 이야기한 그대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 쌍청루 누각안에 있는 호랑이 문양
▼ 쌍청루 누각에서 바라본 여장과 낙안벌판
▼ 쌍청루안의 대들보의 모습과 누각의 모습으로 누각이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누각보다는 정자라는 느낌이 많이 느는 것은 저만 느끼는 감정일까요?

▼ 쌍청루에서 바라본 옹성으로 사진으로 봐도 옹성이 작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옹성안의 공간도 너무나 작은 느낌을 받습니다. 옹성을 지탱하는 민석들은 규모가 되는 것 같은느낌을 받습니다.
▼ 쌍청루에서 바라본 남측방향으로 조선시대때 벌교나 강진 등을 가기 위해서는 이길로 나섰겠죠.
▼ 쌍청루의 단청의 모습입니다.
▼ 쌍청루의 처마의 모습으로 우리 한옥은 우리나라 자연에 잘 어울리는 건물인 것 같습니다.

▼ 쌍청루에 왜 총안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옹성의 규모도 작아서 바로 성문과 연결되는데 쌍청루에 아무런 방어시설이 없이 누각을 만들었는 것에 관하여 의문이 계속해서 꼬리를 뭅니다.
▼ 이제 쌍청루를 멀리하고 동문을 향해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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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팬저의 국방여행 : 낙안읍성 옹성이 왜 이렇게 작지? 2012-11-09 18:07:30 #

    ... 있는 낙안읍성을 제대로 복원을 하면 좋을 것을 이런식이면 곤란한데 말이죠. 낙안읍성 그 비밀을 찾아서 _01낙안읍성 그 비밀을 찾아서 _02낙안읍성 그 비밀을 찾아서 _03 낙안읍성 그 비밀을 찾아서 _04낙안읍성 그 비밀을 찾아서 _05낙안읍성 그 비밀을 찾아서 _06 ... more

덧글

  • 유진우 2008/07/02 16:02 # 삭제

    남측 성곽은 언덕이라는 자연지형을 활용해 성곽을 그렇게 높게 쌓지 않았습니다.
    춘천의 봉의산성과 같은 경우 경사가 급한 곳은 성곽 높이가 1m를 약간 넘는 수준이기도 하죠
    원래 북문도 있었지만 호환이 워낙 심해 폐쇄했다고 하는군요. 성내의 관아 건물 중 일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제6 보병사단( 아군의 신속한 낙동강 철수로 인해 전라도를 완벽하게 석권 ) 병력 혹은 후속부대에 의해 불타버렸다고 합니다
  • 팬저 2008/07/02 23:36 #

    말씀 하신것 처럼 원래 북문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조선시대때에는 풍수지리가 워낙강해서 풍수적인 영향은 아닌가도 생각도 들더군요. 6.25때 관아들중 일부가 탔다고는 하던데 인민군의 병력등에 관해서는 잘몰랐는데 알려주어서 감사합니다.
  • 이곡동 2010/05/09 21:17 # 삭제

    안녕하세요. 글을 읽다가 궁금한게 있어서요.

    '조선시대 일반적인 읍성들은 성안에 살지않고 성밖 집성촌에 살았다.'고 하셨는데 정말인가요?
    성이라는게 기보적으로 외적으로부터 방어하는 도시인데 양반들으 성안에 살지않았다는게 신기해서요.

    에컨데 대구읍성의 경우도 그랬는지 궁금합니다.
  • 팬저 2010/05/10 10:20 #

    읍성안에는 백성들과 아전들이 살았고요. 양반들의 경우 읍성 밖에서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습니다. 이는 읍치의 수장인 수령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고 또 하나는 중앙에서 관리를 하고 내려온 사람이 읍성안에 있으면 수령이 불편해서 자리를 피해주기 위해서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또 하나의 경우 읍성안에는 농사를 짓는 넓은 공간이 없어서 양반들의 경우 농사를 짓기위해 읍성 바깥에서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봐야합니다. 일반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양반들이 농사를 하지 않으니까 농사를 짓기위해 양반들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하니까요? 대구읍성의 경우 경상도를 관리하는 경상감영이라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이야 대구시가 상당히 크지만 조선시대에는 읍성이라 해봐야 요즘 기준으로 00동 00동 2개 정도의 규모이니까 아무래도 공간이 작기때문에 대구읍성 바깥에서 살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 이곡동 2010/05/10 13:31 # 삭제

    그렇군요. 저는 서양식 도시처럼 중간에 관아. 한쪽에 양반동네, 다른쪽에 서민들 이럴줄 알았는데
    읍성은 도성과 또 달랐나보네요.

    농업이 기반이라 성안보다는 장원쪽에 주변에 소작농들 가운데 자기들 좋은 집 짓고
    살았다고 보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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