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통영상륙작전3 6.25전쟁



▼ 전편에 이어서 통영상륙작전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원문고개전투에 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아래 구글어스 지도에 보는 것처럼 인민군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겠고 한국군의 입장에서는 다행한일이죠. 원문고개를 점령했으니까요? 통영을 오기위해서는 반드시 원문고개를 거쳐야 하는데 국국이 길을 막고있으니 얼마나 눈에 가시같은 존재같겠습니까?
▼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멀리 고성에서 출발한 인민군들은 원문고개를 지나기 전에 대한민국 해군의 함포에 의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상태에서 원문고개를 공격했지만 패전의 결과만 낳았습니다.
▼ 북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인민군진출로는 선택의 폭이 없습니다. 지도를 보다시피 우측은 산세가 험하고 좌측은 바다여서 갈수도 없는 곳입니다. 원문고개만 방어만 한다면 국군은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아군이나 적군이나 상당히 중요한곳 이었습니다.
▼ 조금 확대를 해보았는데요.인민군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수 있는 지형적인 구조도 승리의 원인이 되었지만 아래에 이야기를 적어놓았지만 해병대를의 불굴의 의지도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바다 건너서 원문고개 방향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해군 함정들은 보이는 바다에서 원문고개 방향을 향해 지원사격을 하였습니다.
▼ 조금 확대해본 모습입니다.
▼ 원문고개에서 전적비가 있는 곳을 향해 바라보았습니다. 야산이 있는 데 높지는 않습니다. 이곳에서 해병대가 인민군 7사단 병력을 막아내었습니다. 그 현장에 전적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 전적비가 있는 공원은 LVT7수륙장갑차와 M47전차가 놓여져 있습니다.
▼ 원문고개 전투에서 빼놀 수 없는 사람이 두분 있는데 한분은 얼마전 타게한 김성은 4대 해병대사령관님과 또 한분이 고종석님입니다. 고종석님의 이야기를 보면 해병대는 적의 유일한 공격로가 될 원문고개를 방어하기 위해 제2중대와 7중대를 이곳에 배치해 방어진을 구축하고 고성방면으로 침공해 올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 하였지만 원문고개 이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원문고개에는 성문을 만들고 수비를 할 정도 였으니까요.
▼ 계단을 지나서 통영지구전적비를 올라가면 됩니다.
1950년 8월 19일 오후 3시 40분 경 인민군은 활로를 찾기 위한 반격을 가해왔습니다. 무려 3시간 동안 580발의 포격을 원문고개의 아군에 가해왔다. 마침내 오후 7시가 되자 적은 1,000여 명의 병력으로 제2중대와 7중대 진지 정면으로 쇄도해왔다. 해병대는 박격포와 703함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적을 분쇄하기 시작했으나 적은 시체를 방패삼아 진내로 돌입,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피·아 간의 혈전은 4시간이나 계속되어 오후 11시 50분쯤에야 끝났다. 적은 수많은 시체를 남겨놓은 채 도주하였다.
▼ 확대해 본 모습으로 두명의 해병대가 승리를 환호하는 모습의 형상입니다.
해병대원들은 적의 시체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잠시나마 눈을 붙이던 8월 20일 오전 2시 40분 경 적으로부터 재반격을 받았다. 한 밤의 정적이 포성으로 깨지고 침투해 온 적으로 인해 제7중대 진지 일각이 돌파되기도 하였다. 또다시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총검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치는 것 외에는 전투기술이 필요가 없었다.
이 때 제1소대 1분대를 지휘하던 고종석 3등 병조는 한 순간 힘이 빠지고 있음을 느꼈다. 적탄 2발을 왼손에 맞았던 것이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사격을 계속해 적을 사살하는 등 분전을 거듭하였다. 적이 철수한 것은 오전 8시가 지나서였다.
▼ 태극기와 해군기, 해병대기가 나란히 펄럭이고 있습니다.
고종석 3등 병조는 후송을 거부한 채 진지를 강화하며 방어태세를 굳히고 있었다. 21일 오후 10시쯤 적은 예상대로 다시 야간공격을 가해 왔다. 통영을 공략하려는 그들의 계획을 끝까지 달성하려는 듯 대규모 병력으로 3차 공격을 가해 온 것이다.
적의 발악적인 공격은 갈수록 치열해져 세 번째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선봉인 듯한 적 일부가 제1소대 진지로 파고들었으며, 또 한 무리도 고종석 3등 병조가 지휘하는 제1분대를 엄습해왔다. 그는 부상당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총검을 잡고 적과 맞서 싸웠다. 그가 6명의 적을 척살했을 때, 적들이 흩어지는가 싶더니 수류탄 1개가 날아들었다.
▼ 정면에서 바라본 전적비입니다.
위기였다. 그러나 많은 것을 생각할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다. 22세의 고종석 3등 병조는 '엎드려!'라고 외침과 동시에 수류탄을 향해 온 몸을 던졌다. 폭음이 들리고 그는 산화하였다. 분대원들은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은 채 분대장의 최후를 목격하였다. 그것은 분노로 이어져 일제히 진지를 박차고 나와 적들을 척살해 나갔다.
적은 이후에도 통영을 점령하기 위해 계속 공격해왔으나 해병대의 강인한 투지와 용맹 앞에 좌절을 거듭해야만 하였다. 전투가 끝난 뒤 분대원들을 구하고 원문고개를 지킨 고종석 3등 병조는 대통령 특명에 따라 2계급 특진, 1등병조로 추서되고 전 장병의 귀감이 되었다.
--- 이상 내용 출처 http://blog.naver.com/ojh7071 ----
▼ 조금 더 확대를 해본 모습입니다. 병사들의 환호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1965년 10월 베트남전 파병을 위해 맹호부대에서 훈련을 하던 중 부하의 실수로 수류탄이 부하들 사이에 떨어지자 이를 몸으로 덮었던 강재구 소령은 지금 육관사관학교 연병장에 동상으로 서 있다. 해군사관학교 정문으로 들어서면 보게 되는 고 이인호 소령은 1966년 8월 베트콩의 지하 땅굴을 수색하던 중 적이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부하들의 목숨을 건지고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했던 베트남전의 영웅이다.
하지만 고종석해병에 관해서는 우리는 알지를 못합니다. 이들 보다도 먼저 손수 자신의 목숨을 전우의 생명을 구한 사람에 관해서는 재 조명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월남전이 있는 사회상 때운이었을까? 아니면 장교라서 조명받는 것일까? 6.25때문이라서 많은분들이 희생되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종석상등병조에 관해서도 재조명되었으면 합니다.
▼ 통영상륙작전은 임진왜란때 있었던 한산도 앞바다에서 해병대가 전과를 올립니다. 임진왜란때에는 일본왜군을 견내량에서 유인하여 한산도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통영상륙작전은 견내량에 있는 장평리에 상륙한다는 점이 틀리고, 임진왜란때에는 한산도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통영상륙작전은 한산도 근처에서 주공보다는 조공의 역할로 활약했다는 것이 틀리다. 또 원문고개 방어를 위해 1개중대 병력이 1,000명의 병력을 막아냈다. 3일간의 인민군 공격을 막아냄으로서 해상작전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 진동전투와 통영상륙작전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인 김성은 전 해병대사령관님의 재빠른 판단이 통영상륙작전의 승리를 가져왔고 해병대원들의 불굴의 투지와 해병정신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2007년 5월 19일자 신문에 김성은 전 국방 빈소 찾은 미 노병이라는 헤드라인기사가 눈에 띄어 읽어 보고 전문을 옮겨봅니다.
지난 2007년 5월 17일 고(故) 김성은(金聖恩) 전 국방부장관의 서울아산병원 빈소. 벽안(碧眼)의 노인이 김 전 장관의 영정을 바라보다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 재향군인회(회장 박세직) 초청으로 15일 방한한 워랜 위드한(74) 예비역 미 해병 대령이다. 위드한씨는 “‘Thank you for coming’이라며 미군의 참전을 기뻐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위드한씨는 6·25 전쟁 발발 직후인 그해 8월 미 해병 5연대 소속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18세의 이등병이었다. “대한민국이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파병돼 진주~마산 지역의 진동리 전투에 한국군 해병 중령으로 참전한 김 전 장관을 처음 만났습니다.” 위드한씨는 “그때 우리 미군의 손을 잡고 이제 나라를 구할 수 있게 됐다며 감격하던 김성은 당시 중령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 불굴의 해병신화 김성은 장군에 관련된 동영상

▼ 아녀자와 여성들이 짐을 옮기고 있는 부조물 그리고 해병대 마크입니다.
이후 위드한씨는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전투, 장진호 전투 등에 참전, 박격포 파편에 부상을 입고 그해 12월 일본으로 후송돼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미 해병 장교가 된 위드한씨는 1970년대 중반 팀스피리트 훈련 때 연대장(대령)으로 한국을 찾았다가 김 전 장관을 다시 만났다. 이후 전역한 위드한씨는 한국전참전전우회 워싱턴 DC 회장으로 한국을 찾았고, 이때 김 전 장관을 만나 ‘진동리 전투 서클’을 만들어 서로 한국과 미국을 오갈 때마다 만남을 이어 왔다.
▼ 해병대와 해군의 모습이 담긴 부조물
이번에 방한하기 전 위드한씨는 김 전 장관을 17일 환영만찬에서 만나기로 이메일로 약속했다. 하지만 15일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그를 기다린 건 김 전 장관이 몇 시간 앞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위드한씨를 공항에서 영접한 박래혁 향군 해외참전부장은 “김 전 장관 별세 소식을 듣고 위드한씨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말했다.
위드한씨는 김 전 장관이 참석하지 못한 환영만찬 연설에서 “나라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면 그 나라엔 영웅이 없어서이기 때문”이라며 “대한민국이 폐허에서 번영을 이뤄낸 데는 ‘김성은’이란 영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애도했다. 위드한씨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받은 김 전 장관은 김장수 국방부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18일 오전 7시 해병대사령부장(葬)을 끝으로, 국립 대전현충원 제1장군 묘역에 안장됐다. - 신문기사 내용 끝 -
▼ 해군의 마크
다시 원문고개 전투 이야기로 돌아와서 해병대는 적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해 원문고개에서 방어 작전을 폈다. 그러나 최후의 활로를 찾기 위해 인해전술로 해병진지에 침입한 북한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 교전에서 아군은 4시간에 걸친 혈전 끝에 적군을 격퇴했다. 이후 20일과 22일에도 적의 침공은 계속됐으나 김성은 부대는 적을 무난히 격퇴시켰다.
▼ 해병대의 통영지구전투는 6.25 전쟁 중 전무후무하게 한국군 단독으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전투이자 철수작전 수행 중 결행된 유일한 공격작전으로 전사에 남아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적 사살 469명(아군 전사 15명), 포로 83명, 야포 3문, 중기관총 6문, 경기관총 22문, 다발총 128정, 박격포 2문 그밖에 각종무기·차· 장비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 전적비공원내에 있는 M47탱크
▼ 전적비공원내에 있는 M47탱크
▼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로서 고성방면을 본 모습입니다.
▼ 거제방향의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입니다. 뒤에 보이는 산넘어서가 해병대가 상륙했던 곳입니다.
▼ 원문고개에서 고성방면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인민군 7사단 병력들이 저 아래에서 올라오기 시작했겠지만 보시다시피 아군이 참호르 파고 대기한다면 어디가 유리한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 누군가 갔다 놓았는지 모르지만 한개의 작은 돌탑이 전적비공원에 있었습니다. 소망을 빌기 위해서겠죠. 이제 우리나라가 전쟁이 아닌 평화가 지속되기를 저도 빌어봅니다. 하지만 평화는 언제나 전쟁을 준비할때만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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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이순백 2008/11/09 18:08 # 삭제

    전쟁당시 UN군 희생자를 추모하는 11월 11일 11시 행사를 앞두고, 당시 해군 703함 통신병으로 참전햇든 기억을 되살리고저
    검식을 해 봣읍니다
    전적비에 한번 가보고 싶읍니다 당시전사자들의 희생과 공헌에 감사드리고,그희생과 공헌 위에 나와 내 가족 나아가 나라의 오늘이 잇음---감사드립니다
    당시 703함은 인천상륙작전 진입해로 확보작전--영흥도 상륙작전중 피격, 진해서 수리마치고,통영작전에 참전 햇엇읍니다
  • 팬저 2008/11/09 23:53 #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연세가 상당하시겠네요. 그들의 노고와 희생이 있기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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