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포와 제포성지 그리고 삼포왜란 2 진성(鎭城)



▼ 제포와 제포성지 그리고 웅천읍성등에 관련된 지도상의 설명입니다. 웅포해전장소는 매립하기전에 있었던 곳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다음에 웅포해전에 관련되어서 다시 글을 올릴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포성은 제포진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진성은 지금의 해군기지사령부에 버금가는 관방관아(關防官衙)로 우리해역은 물론 인접 수군 영진(營鎭)을 포함한 남해방어와 어민을 보호 관장하는 요새지라 할 수 있다.
▼ 제포성지와 제포입니다. 지금 바다를 매립하였지만 제가 옛날당시를 생각하여 매립하지전을 상상하여 바다로 만든 것입니다. 제포에서 왜인들이 웅천읍성을 가기위해서는 지도상에 보이는 길로( 제포성 동쪽성곽을 따라서) 갔을 것 같습니다.
▼ 제포성지 추정도입니다. 저번에 추정도를 만들었는데 다시 수정하였습니다. 빨간원으로 되어있는 곳은 제가 가보았던 곳이고 사진을 찍었던 곳입니다.
▼ 전편에 이어서 서쪽방면에 있는 제포성지 성곽을 찾아갑니다. 아래사진은 제포성지 서쪽에 있는 밭에서 만난 성곽
▼ 제포성지에서 제포방향을 본 모습으로 날씨가 안좋아서 자세히 나오지를 못했네요.
▼ 제포성이 있는 조그마한 야산으로 주위 지형을 살려 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해안까지 8,916㎡의 넓이로 쌓았다.
▼ 여긴 제포성 서쪽지형입니다. 나무가 많이 있는곳에 보시면 성곽의 흔적이 보입니다.
▼ 제포에서 제포성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제포성은 현재 새롭게 복원공사 중입니다.
▼ 조금 더 확대해 본 모습입니다.
▼ 매립지에서 제포항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 매립지에서 제포마을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 확연하게 위에 있는 작은돌과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성곽의 돌입니다.
▼ 가정집 담도 일부 제포성지의 성벽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래쪽에 보면 큰 성곽의 돌들이 있고 그 돌들은 성곽의 돌같은 느낌이 듭니다. 작은 돌들은 인근에서 가져왔겠지만 큰 돌은 성곽의 돌같은 느낌이 듭니다.
▼ 제포성지중 제대로 남아 있는 성곽을 찾기위해서 작은 동네이지만 두시간을 헤메다 겨우 찾은 제포성지의 성곽입니다. 아래사진에 보이는 두개의 모텔사이에 있습니다.
▼ 모텔들 사이에 보면 계단이 보이는데 계단을 이용해서 올라가면 금방 찾습니다.
▼ 조그마한 제포성지 이정표때문에 찾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 계단을 따라서 20미터 정도가면 제포성지의 성곽이 보입니다. 어찌나 반갑던지....
▼ 제포성지의 성곽은 조선초기에 만든성곽 구조와는 조금 틀리게 되어있더군요. 조선초기 읍성은 대부분 아래단에 큰돌을 쌓고 위로 가면서 작은돌을 쌓는 방식인데 여기는 작은돌들이 이루어져있었습니다.
▼ 제포성지의 우측면 성곽입니다. 삼포왜란당시 가장 치열한 현장이 아니었을까 추정하는 곳입니다.
▼ 삼포왜란당시 왜군들의 침입로를 가정한 것입니다. 이유는 제포와 제포성지사이에 있는 땅은 매립을 하였기 때문에 침공할 수 있는 곳은 화살표로 표기한 길과 해로 뿐입니다. 그리고 위에 있는 곳이 출입문 역활을 하는 성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들고 남쪽에서 봐서 좌측은 조금은 가파른 곳이지만 우측과 성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좌측에 비해 경사가 심하지 않습니다. 물론 해자가 있습니다만, 그리고 웅천읍성은 남문인 진남루로 공격할 수 빡에 없습니다. 일단 왜군이 침공을 한다면 웅포로 오지 않는 이상 제포를 거쳐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왜군이 공격을 했다면 남문인 진남루와 동문인 견룡루로 공격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위에서 찍은 제포성지 성곽입니다. 구조를 보면 성곽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 바로 위에는 제포성지 복원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편에 제포성지 복원공사 모습이 있습니다. 복원공사현장과 이곳과는 15미터 정도 됩니다. 아주가까이 있지만 제가 이곳을 찾는데에는 2시간 이상이 걸렸다는 사실입니다.
▼ 여기도 빨리 보강공사와 함께 주변정리를 한다면 그 옛날 화려했던 제포성의 모습이 나타날 것 같습니다.
▼ 제포성지의 성곽중 치성부분으로 추정이 되는 성곽입니다.
▼ 제포성지에서 바라다본 제포방향입니다. 이곳에서 제포의 동정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성곽에서 아래쪽을 바라다 본 모습입니다. 어느정도 경사가 있어서 적이 접근하기가 힘들 것으로 생각이 되지만 삼포왜란때 제포성지는 왜군들에게 성을 빼앗기는 수모를 격게 됩니다.
▼ 나무와 숲이 많이 우거져 있어서 성곽의 구조를 알 수는 없지만 자세히 보시면 성곽구조가 보입니다.
▼ 남아 있는 성곽의 구조로 보아서는 여장은 없는걸로 보입니다.
▼ 제포성지에서 바라다 본 제포입니다. 조선시대때 여기서 출입하는 선박들을 감시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 아래 사진들은 진해박물관에 있는 웅천도요지 미니어처입니다. 웅천 제포를 지나 웅천읍성에서 불과 10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웅천도요지가 있다.
▼ 웅천 찻사발류의 제작시기를 14세기 중반에서 삼포왜란(1510년)까지 약 50~60년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곳 두동리 요지는 1424~1432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 도기소, 자기소에 나와 있지 않은 점과 발굴 유물 중에 지명과 관사명이 새겨진 명문이 보이지 않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지명과 관사명을 새긴 공납자기 생산지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발굴 유물 중에 '興', '上' 자 등의 명문이 있긴 하나 공납 자기를 방증하는 유물로는 미약하다. 두동리 요지를 적어도 1432년 이후의 성립으로 보는 이유 중의 하나다. 제작 시기의 하한연대는 1510년의 삼포왜란까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삼포왜란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규모가 큰 전쟁은 아니지만 대마도 일본 군사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전란으로 단순한 폭동을 넘어서 그 피해가 심각하였다. 그 후유증으로 일본과의 통교가 중단되고 웅천 일대에 소개령이 떨어졌다. 주민들을 격리시키면서 자연스레 가마는 소멸된 것 같다. 두동리의 가마가 제포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겠지만 유동인구 수 천 명과 국제 무역항 주변의 수요 그리고 민수용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지금 일본에 남아있는 찻사발들 중에 웅천 사발류는 어떤 것이 있을까? 첫 번째 이도(井戶)류의 사발이다. 오오이도(大井戶), 아오이도(靑井戶), 이도와끼(井戶脇), 코이도(古小井戶) 등이 있다. 두 번째로 소바(蕎麥)류를 들 수 있다. 소바를 비롯하여 또또야(斗斗屋)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소바는 이도와 거의 흡사하나 형태만을 달리한다. 세 번째로 카끼노헤따(○)류가 있다. 카끼노헤따는 지금까지 정확한 산지를 추정하기 힘들었으나, 웅천 근교에서 비슷한 도편을 본적이 있다. 하지만 카끼노헤따의 전부가 웅천산 사발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네 번째로 귀얄사발류를 들 수 있다. 발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귀얄사발이 다수 출토되었다.웅천 귀얄사발의 특징은 비파색 또는 청회색에다 그릇 안쪽에 힘찬 귀얄동선이 그려진 것이 많다.
▼ 일본의 전세 찻사발을 실물과 자료를 조사 해보면 의외로 웅천 근교에서 생산된 찻사발이 많은 것에 놀랄 때가 있다. 이것은 웅천 찻사발이 제포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었음을 방증해 주고 있다. 또 제포 왜관에 11개의 사찰이 있었던 사실과 차와 관련이 많은 선종계통의 스님이 권력자의 스파이로 상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웅천 찻사발의 일본 전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막부의 권력자들이 흥리 왜인과 결탁하여 국제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웅천의 찻사발도 끼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포의 왜인들은 국제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키워가다가 조선의 통제강화로 인해 기득권 유지가 힘들게 되자 최후의 수단인 무력으로 삼포왜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곳 웅천 근교의 찻사발은 지리적 여건 때문인지는 모르나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찻사발의 입지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 이도다완의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578년이나 고려다완의 이름으로 나오는 기록은 1537년이다. 이때는 찻사발의 이름이 구체화되기 전의 단계라 세분화되지 않다가 초암차의 완성과 더불어 찻사발의 이름이 세분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초기에는 고려다완으로 막연하게 불려졌던 것 같다. 일본의 기록 1537~1583년 사이에는 거의가 고려다완으로 나오며 가끔 이도(井戶)의 이름이 보이다가 1583년 도요또미히데요시가 집권한 이후의 기록에는 고려다완과 이도다완의 이름이 비슷하게 나오며 분청의 인화문, 귀얄다완 등의 이름도 속속 보인다. 이것은 도요또미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 다시 말해 차두 센리큐(千利休)의 활약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조선산 찻사발이 눈에 띄게 늘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록을 분석해 보면 장군이나 차두가 아니고는 이도 찻사발을 감히 소지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후 조선 찻사발들이 일본 다도의 중국 찻사발을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시켰는데 웅천 사발들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
▼ 1510년 삼포왜란 이후 제포와 웅천 가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50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고려, 조선 찻사발로 혹은 웅천 찻사발로 남아 있으니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또 근래에 와서 그들의 흔적을 찾으며 보듬는 후예들이 대를 이으니 그 옛날 웅천 사기장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웅천 찻사발 이야기는 http://blog.naver.com/bymin7 님의 이야기 발췌
▼ 웅천 차사발의 유래와 특징에 관해서 웅천 사기장 최웅택씨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웅천차사발을 탄생시킨 웅천도요지는 조선시대(15~16세기)분청사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진해시 웅천 보개산(점골)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500여년전 웅천 제포항을 개항하여 일본에 수출한 차사발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진웅천, 귀웅천, 후웅천으로 구분되며 우리의 분청사기인 차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 차그릇으로 사용되면서 고려차완이라고도 불리우고있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고 우리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큰영향을 미쳤음은 역사적으로 고증된 사실이며 특히 16세기부터는 우리나라 자기류가 일본에서 차완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 웅천차사발의 하나가 일본 국보(기자에몬 이토)차완으로 지정 되었다는 학설이 있음은 우리나라의 찬란한 도예문화의 유산이며 진해의 자랑거리가 아닐수없다.

웅천차사발은 그릇의 선이 아름답고 단아하며 허리부분이 깊은 질그릇으로 원형이며 그릇의 끝부분이 젓혀있고 그릇안쪽에는 둥근 차앙금 자리가있어 다른 차사발과 구별이 되며 일본차인들은 그것이 작고 뚜렷하게 있는 것을 중히 여긴다. 사발 입시울이 되바라지고 허리에서 몸통에 걸쳐 둥글게 부풀고, 굽은 높고 크게 깍았으며 굽바닥에서 몸통까지 다소 두껍게 성형 되어있다. 소지는 흰색 흙, 붉은 흙을 같이 쓰고 있으나 흰색 흙을 더 마니 사용했다, 잿물빛은 비파색과 회백색을 기조로하고 있지만 산화와 환원의 작용에 따라 사발마다 색의 변화가 많다. 특히 웅천차사발에는 그릇의 태토를 숨기지 않는 솔직함과 당당함이 느껴지고 덤벙 담그는 잿물과정에서 구김살없는 유아적 천진함마저 느끼게한다. 어떤 기교와 장식도 하지않고 무심으로 빚어 만들어 놓은 차사발에는 자연미와 격에 맞는 형식이 차사발에 담겨지며 자연스런 아름다움이란 오랫동안 숙련된 기술과 체험에서 우러나오며 도공의 손재주가 아닌 마음으로 빚은 그릇에서만 나타날수있다."
--- 야후블로거 http://kr.blog.yahoo.com/woungchenyo 발췌
▼ 최웅택씨는 웅천도요를 계승하는 사람으로 "이곳 도요지는 조선(400여 년 전)웅천 이도차완을 재현 하고 창작하는 조선 웅천, 거관도공의 후예의 집입니다. 뒷 보개산은 임진정유왜란 때 도공을 포함한(125명)이 일본 히라도 섬으로 납치되어간 유서 깊은 고요지가 있는 곳입니다. "라고 이야기 한다. 2005년 6월에 부산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면 " 지난 6월에는 일본 국보 26호로 지정되어 현재 교토시 대덕사 고봉암에 보관 중인 막사발을 직접 보고 와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일본 수상이 와서 보자고 해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 국보 다완은 임진왜란 당시 진해 웅천에서 챙겨간 전리품으로 추정된다. " 라고 적혀 있다.
▼ 위의 사례를 보듯이 웅천도요는 일본 도자에 큰획을 준 도자로서 삼포왜란은 직접적으로는 조선의 억압이 심해지자 난을 일으킨 것이 되지만 위치상으로 가까이 있는 웅천 사발을 가져가려는 또 하나의 욕심으로 이루어 진것으로 보고있습니다. 물론 난이 정비되고 대마도가 조선의 경상도로 강제 편입되지만 차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웅천 도요지에서 많은 도공들을 일본으로 데리고 갑니다.
▼ 정유재란때 웅포해전이 있었던 곳으로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상륙으로 웅천읍성을 점령하고 도공들을 데려갔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삼포왜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제포는 역사속으로 사라지지만 웅천도요 중 다완은 오늘날 일본의 국보26호로 남아있습니다. 삼포왜란, 사량왜변을 거치면서 조선은 일본의 배를 따라잡고자 판옥선을 개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은 외부와 담을 쌓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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