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포성지 영성(營城)



합포성지는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마산시 합성1동에 있습니다. 합성동이란 말은 합포성이 있었던 곳이라서 합포의 합자와 성을 합친말입니다. 아래 지도를 보시면 합성초등학교와 가까운곳에 합포성지가 있습니다.
합포성의 성곽의 길이가 1.4km라 합니다. 아래 그림은 제가 추정하여 올린 것입니다. 현재있는 합포성지의 성벽과 합성초등학교 건물이 바라보는 위치가 똑같습니다. 경전선이 있는 방향도 아니고 시외버스터미널 앞 도로 방향도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합포성과 합성초등학교는 합포성과 밀접한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합성초등학교 서쪽벽이 합포성의 성벽이었다고 합니다. 그기준으로 제가 임의로 추정한 합포성지입니다.
▼ 1910년대 합포성지 주변 지적도입니다. 제가 대충 잡았던 합포성지 추정과는 성의 둘레는 비숫하나 형태는 많이 틀리네요. 아래 그림을 보니 치성과 해자가 보이네요. 이미지출처 -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 마산시외버스터미널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합성동지역을 찍었을때는 저녁이고 합포성지를 찍었을때는 낮이기때문에
사진상 차이가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직선거리로 간다면 10분이내에 있습니다.
▼ 골목골목이라서 찾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만 아래사진에 나오는 합성성터주차장이나 합성동파출소를 찾으면 찾기가 쉽습니다. 성터주차장이란 이름이 말해주듯이 합포성지는 주차장 뒤에 있습니다.
▼ 합포성지는 지금 현재 일직선상으로 80m정도 남아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병사는 조대곤이었는데 4월 20일 김해성을 격파하고 21일에는 창원을 위협했다. 조대곤은 김해성을 구원할 생각도 않고, 일본군이 창원 방면으로 진격해오자 진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렇게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부산진성과 동래성, 밀양성을 무너뜨리며 한양을 향해 북상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있기전 경상우병사 조대곤이 나이가 많으니 교체해야 한다고 했다. 조대곤이 도망가자 함안군수 유숭인이 경상우병사가 된다. 유숭인이 경상우병사가 된것은 임란 직전에 김성일은 경상우병사로 부임했다.부임하러 오는 도중 왜란이 일어나자 대로한 선조는 김성일을 처벌하려고 서울로 붙들어 올리다가 유성룡 등의 변호를 듣고 초유사로 삼아 전선에 되돌려 보냈다.
▼ 성벽위의 모습으로 우병사가 된 유숭인은 임진왜란시(1592년 9월 24일) 창원 동쪽 노현(露峴)에서 2천여명의 병력으로 저지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진주로 후퇴하여 동문 밖에 진을 쳤다. 유숭인은 진주성을 가서 진주성안에서 싸울 것을 진주목사 김시민에게 요청했지만 김시민은 거절한다. 자신보다 계급이 위인 경상우병사가 올 경우 지휘체제의 문제로 인해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날 동시에 왜군 2만여명이 진주성앞에 나타나서 문을 열어줄 형편이 되지않았다. 진주성의 지원없이 유숭인과 경상우병영 병사들은 적의 대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 부적으로 모두 전사한다. 이때 같이 참여한 사천현감 정득설과 거제군관 주대청이었다. 김시민은 성밖에서 유숭인 군이 전멸하는 것을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나가 지원하지 않았다. 이는 섣불리 나섰다가 자신뿐만 아니라 진주성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불별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서도 이부분에 관해서 잠깐 이야기 한다. 유숭인이 문을 열어달라고 하자
김시민 : 성문은....열지 않는다!!! (성문을 열지 못함을 용서 하시오... 우병사 영감... 지금 성문을 열면....왜군은 밀물처럼 성으로 밀려들 것이고, 허면.. 진주성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야 말것이외다...)
유숭인 : (앞으로의 싸움이 꽤나 고단할 겝니다..김목사)
김시민 : (우병사 영감....)
유숭인 : (우리의 분전이 진주성 사수에 작으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오이다. 무운을 빕니다.)
유숭인 : 오늘 만큼 나는... 내가 조선의 장수인것과... 그대들의 상관인 것이 자랑스러웠던 날은 없었다. 우리 경상도군이 최강의 강군임을 잊지 말지니.... 최후의 일인까지...최후의 일각까지 적을 맞아 싸워.....이겨라 !!! 돌격하라 !!! 왜적을 남김없이 섬멸하라...
▼ 성벽위의 모습으로 인근의 주택과 상당히 가까이 있습니다. 합포성지는 합성동 주택단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북쪽 성벽 안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덩그라니 있다.
▼ 성벽은 조선시대 읍성의 특징인 아랫부분에 큰 돌을 쌓고 그위에 작은돌로 쌓는 방식으로 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이 성을 처음 쌓을 때에는 성 위에 2자(尺) 간격으로 여장(女墻·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만들어, 여장마다 방패와 창을 하나씩 설치한 뒤 병사들이 이곳에 몸을 숨기고 왜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그때 이 성의 동쪽에는 원인문(元仁門)이, 서쪽에는 회의문(會義門)이, 남쪽에는 회례문(會禮門)이, 북쪽에는 용지문(勇智門)이 있었다. 성 안에는 의만창(義滿倉)과 회영고(會盈庫) 등의 건물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 성곽에서 제2금강산을 바라본 모습
▼ 아래쪽에 설명이 나오겠지만 경상우도 병영성이라면 경상좌도 병영성인 울산 병영과 함께 경상도를 좌우로 나누어 군사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우병영과 좌병영은 낙동강을 기준으로 두게 되었으며 우측에 있는 울산이 우병영이 되어야 하나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보면 울산은 좌측이 된다. 그래서 울산은 좌병영 합포는 우병영으로 되었다. 병영은 지금으로 이야기 하면 사단급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인원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병마절도사의 위치를 이야기 한다. 임란 후 합포성의 위치가 왜적들에게 분탕질을 당할 수 있는 위치라서 진주성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옮기게 된다. 우병마절도사는 무관 종 2품으로 구성되어진다.
▼ 경상우도 병영성으로서 평지방형성곽 형태를 보여주며 부원수 배극렴(1325~1392)이 왜구를 막을 목적으로 고려 우왕4년(1378년)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에 걸쳐 돌을 쌓았다. 그후 조선 세종8년(1426년) 좌우도병영성이 합쳐지면서 경상도병영성이 되었다가 세종12년(1430년)에 고쳐 지었고, 세종19년(1437년)에 다시 분리된 후 선조26년(1593년)에 진주로 우도병영을 옮긴 후로는 합포진으로 사용하였다. 기록에는 1602년에 옮긴 것으로 나오고 있다.
▼ 합포성지를 안내해주는 안내판
▼ 동쪽에서 서쪽 방향을 바라본 성곽의 모습. 합포 성의 성벽은 바깥 벽 아래 기초석을 밖으로 내고 내벽을 계단 모양으로 쌓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좁은 것이 특징이다. 성벽에 사용된 돌은 마산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점판암(점토가 굳어져 만들어진 돌로서 검은 빛깔이며 얇게 잘 갈라져 비석이나 벼룻돌로 사용)이며 돌의 크기는200×150×80㎝정도다.

지금 남아 있는 북쪽 성벽의 내벽 바깥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목조 건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 일부 남아 있으며, 이 건물터의 좌우 측면과 뒷면에는 토담벽을 쌓았던 흔적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면적 1,881㎡, 둘레 1,416㎞, 폭 3.53m.
▼ 사진을 보면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성곽의 모습을 보여준다.
▼ 치성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되어지는 성곽.
▼ 성곽주위에 발군할 당시에 나온 성벽모습 이미지출처 -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 성곽주위에 발군할 당시에 나온 성벽모습 이미지출처 -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 치성은 성곽앞으로 조금 더 튀어나와서 적이 담을 넘을 경우 적 뒤에서 공격하는 성을 이야기 한다.
▼ 계단의 모습
▼ 성곽을 이용하여 상추를 심어 놓았다. 우리의 유적들이 이렇게 방치되고 있다.
여기에 적혀 있는 안내판과 창원읍성에 적혀 있는 내용이 일치 하지 않는다. 창원읍성의 기록을 보면 임란당시 창원읍성이 함락을 당하여 지금의 창원읍성자리로 옮긴다고 하는데.. 아직 제가 이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조금 더 조사하고 공부하여 자료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자료를 올리고 나니 합포성지 근처에서 치성이 발견되었다는 2006년 11월 기사를 보았습니다. 치성현장에 가서 사진을 찍어서 다시 올리도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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