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봉선생 함안 칠서 "무산사" 조선시대



무산사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유학자인 주세붕(1495∼1544) 선생의 영정과 유품을 모신 곳이다. 선생은 중종 38년(1543)에 백운동 서원을 세워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으며, 이를 기리기 위하여 숙종 24년(1698)에 선생의 후손이 세웠다.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유림들이 다시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불탔다. 현재의 무산서당은 그 후에 세운 것이다. 무산사 내에 있는 무산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1층 건물이다.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중앙 2칸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 옆에 각각 2칸과 1칸의 방을 꾸며 전형적인 서당의 공간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광풍각에는 주세붕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장판각에는 『무릉잡고』·『수구집』·『귀봉집』책판 352매가 보관되어 있다.
▼ 위치는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이다. 중앙고속도로 칠원IC에서 칠북방면200m내외라서 가기는 편하지만 주변에 중소기업 공장들이 많아서 물어보는 것이 빠른편이다.
▼ 이곳에서 남지방면으로 가면 주세봉선생의 묘가 있다.
▼ 주세봉 선생의 업적을 보면 조선조 11대 중종 38(1543년) 풍기군수 주세봉이 백운동 서원을 건립한 것이 서원의 시초이며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가 됨. 명종 5(1550)년 이황이 군수로 부임하자 임금에게 아뢰어 노비, 전결 및 소수서원이라는 액서를 받아 이름을 고치니 이것이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음. 임금은 이 밖에도 대제학 신광한에게 명하여 기(記)를 만들게 하고 사서, 오경, 성리대전 등의 책도 내려 주었음. 그 후 중종 39(1544)년에 문정공 안축, 문경공 안보, 인조 11(1633)년에는 주세봉을 추배. 고종8(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계속 유지되었으며 현재까지 전하여 짐. 서원은 요즘말로 하면 사학교육단체이다.
▼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봉에 의해 인삼의 재배기술이 전국적으로 퍼졌다. 중국의서인 '신농본초강목(神農本草綱目)'엔 고려인삼을 '상약 중 상약'으로 칭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인삼을 알리고 농업기술을 혁신한 인물이 주세봉선생님이다.
어버님 날 낳으시고
주세봉
어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부모 곧 아니시면 내몸이 없으리오
이 덕을 갚으려하다 하늘 가이 없으시다
오륜가의 첫 구절이다. 유교 윤리의 다섯 가지 기본항목인 오륜을 일반에게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노래로 풀이한 것으로 6장으로 되어있다. 주세붕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유교 윤리에 대해 많은 애착을 가지고 지방고을 수령으로 나가 백성들을 다스릴 때 기본으로 삼았다.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형으로서 아우를 송사하여 그 재물을 빼앗으려는 백성이 있었다. 주세붕이 그 백성을 시켜 제 아우를 업고 종일 뜰을 돌게 하되, 게을러지면 독촉하고 앉으면 꾸짖었다. 몹시 지치게 되었을 때에 그 백성을 불러 묻기를 ‘너는 이 아우가 어려서 업어 기를 때에도 다투어 빼앗을 생각을 가졌었느냐?’ 하니, 그 백성이 크게 깨달아 부끄럽게 여기고 물러갔다는 일화도 전한다. 이처럼 형벌보다는 유교덕목으로써 백성들을 교화시켰으니, 다스리던 고을 사람들은 이를 칭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주세붕은 그 자신이 효자였다. 7세때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머리에 이가 있는 것을 보고 자기 머리에 참기름을 바르고 머리를 마주대어 이를 옮겨 제거하니 사람들이 그 현명함에 감탄하여 효자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뒤 홍문관 정자로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혔다. 사가독서란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1537년에는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자청, 곤양군수로 나갔다. 그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묘소 근처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1541년 풍기군수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였다.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만을 세운 것은 아니다. 1549년에는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백운동 서원의 예를 따라 해주에 수양서원을 건립하여 해동공자라고 불리는 최충을 제향하였다.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학문이 높고 성균관의 사표로 삼을 만한 인물이라고 하여 내직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주세붕은 내직에 있을 때는 주로 홍문관 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진흥을 통한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1554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동지중추부사 주세붕이 졸(卒)하였다. 세붕은 영남 사람이다. 마음가짐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학문과 덕업(德業)을 닦고 어진 이와 선한 일을 좋아하며 자기 자신을 부족하게 여겼고, 매양 선현(先賢)들의 격언이나 좋은 글을 보게 되면 반드시 창이나 벽에 붙여놓고 끊임없이 외었다. 장사와 제사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로 법칙을 삼았고, 선영이 나지막한 산의 기슭에 있으므로 후세에 논밭으로 변할까 염려되어 묘역둘레에 기와와 돌을 모아 묻어 놓느라 갖은 고생을 다하였으니, 그 효성이 순실하고 지극했다.”

▼ 주세붕의 죽음을 명종이 듣고서 매우 애도하며 관원을 보내 제사 하게하고, 또한 관을 호송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뒤에 조정에서는 예조판서에 추증(追贈)하였으며 문민(文敏)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주세붕선생의 흔적이 깃들인 무릉리에는 예로부터 복숭아, 배 등 유실수를 많이 심고 가꾸어 왔으나 없어지고 지금은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가 남아 유덕을 전하고 있다.
▼ 현 함안군 칠서면의 무릉리에 있는 무산사는 주세봉선생이 중국 무릉도원에서 따온 이름으로, 사람들이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理想鄕)의 마을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조선 중종때 학자 주세붕이 지은것이라고 전해온다.
▼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풍기는 안향(安珦)의 고향인데, 주세붕이 안향의 옛집 터에 사우(祠宇)를 세워 봄·가을에 제사하고 이름을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하였다. 좌우에 학교를 세워 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하고, 약간의 곡식을 저축하여 밑천은 간직하고 이식을 받아서, 고을 안의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준수한 자가 모여 먹고 배우게 하였다.”
▼ 찾아간날이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문이 닫혀있어서 직접 들어가보지 못했습니다.
▼ 무산사의 모습





구글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