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포해전은 마산인가 진해인가? 2 임진왜란



▼ 자 그럼 웅천을 알기 위해 웅천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진해시 웅천동입니다. 우리가 아는 동이란 개념보다는 면에 가까운 동입니다.
▼ 지금 현재 웅천동의 인구는 5,800명 된다고 합니다.
▼ 아래 보이는 곳이 웅천동사무소입니다.
▼ 웅천에는 웅천읍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 이제 웅천읍성을 둘러 보겠습니다.
▼ 이곳은 웅천교회와 진해예술촌사이에 있는 웅천읍성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 웅천읍성은 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1437년(세종 19년)에 웅천읍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약 1Km이고 높이는 4.5m이며, 6개의 우물과 4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 지금은 총길이 936m 폭은 2~4m, 높이 3~4m의 성벽이 동,서,남쪽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 동쪽 성문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들은 모두 동쪽 성문입니다.
▼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본이 읍성 철거령을 내리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 웅천 초등학교 담으로 사용하고 있는 웅천읍성 성벽
▼ 웅천현은 임진왜란 당시 현재의 진해지역을 관할하는 곳이었습니다.
▼ 자 그럼 합포해전이라고 불리는 학개로 떠나보겠습니다. 아래보이는 사진은 학개로 가기전에 만나는 행암입니다. 여기에 조그만한 포구를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행암은 횟집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 진해시민들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 행암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학개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 학개로 가기전에 붙어있는 차량통제안내 현수막에 합포마을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럼 이곳이 합포해전이 벌어진 곳일까요?
▼ 학개로 가는길은 아주 좁습니다. 차량 한대정도 지나갈 수 있는 콘크리트도로입니다.
▼ 아래 사진과 같이 겨우 차하나 지나갑니다. 도중에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대피로가 보이는 곳 까지 가서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현재 도로 확장공사를 한다고 하니 도로완공이 되면 여유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차로 5분 정도 가면 학개란 마을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자 이제 학개라는 아니 합포라는 마을을 만납니다. 산 고개에서 본 합포마을입니다.
▼ 날씨가 안좋아서 멀리 거제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진상에 보면 수평선 끝에 있는 곳이 거제도입니다.
▼ 합포마을에 있는 포구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포구가 너무 작습니다. 아까 행암에서 만난포구보다도 더 작습니다.
▼ 마을의 모습입니다. 사진상에는 다 보이지 않습니다만 12~15가구정도 됩니다. 적함들이 정신없이 달아나다 합포에 이르자 급한 나머지 배를 버리고 숲속에 상륙, 바다를 향해 조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라고 기록에 적혀있습니다. 그것도 적선 5척(대선 4척 소선1척)이 이곳에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보다시피 육지라고는 얼마되지 않습니다. 사진상에 보다시피 제가 방문했을 때 도로포장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 합포마을에서 거제도 방향을 바라본 바다입니다. 또 왜선이 배를 버리고 간 후 조선군들의 배가 도착했다. 합포마을 포구 사진을 보시고 왜선5척과 조선군선들이 과연 저 곳에 몇척이 정박할 수 있을까요?
▼ 포구와 마을을 찍은 모습입니다. 아다케라면 30명의 조총병을 포함해서 대략 60명 정도의 전투요원이 승선했던 것 같다. 비전투요원인 수부(水夫)는 노(櫓)에 따라 조금식 차이가 있으나, 80개의 노를 가진 후다나리형 아다케라면 수부(水夫)도 80여명 정도가 승선하게 된다. 그럼 대선1척에 대략 140명정도 승선한다면 4척이니까 560명에 고바야인 소선에 비전투요원인 수부(水夫)가 대략 20명 정도 타게되고, 전투요원은 8명의 조총병을 포함해서 10명 정도가 탑승한다면 30명 도합 590명이다. 물론 적게 탈수도 있고 많이 탈 수도 있다. 대략 600명 정도가 배를 버리고 허겁지겁 육지로 도망갔다. 웃을 일입니다.^^
▼ 아래 사진은 학개옆에 있는 수치입니다. 이곳의 포구와도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 수치마을풍경입니다. 마산,창원,진해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학개는 몰라도 수치는 압니다.
▼ 수치포구에서 바라본 바다 모습인데 STX 조선이 보입니다.
▼ 수치마을에서 학개로 넘어가는 길을 제가 방문했을때 포장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 길을 포장한다고 하니 학개마을은 옛날에도 오지중에 오지였을 것 같네요.
▼ 자 이제 구글 지도를 가지고 비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보이시는 곳을 보시면 수치와 학개마을을 비교하시기 좋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확대한 모습입니다. 왜선 소선의 크기가 대략10m정도이고 왜선 대선의 크기는 작은 것은 저판 길이가 43자(尺) 정도부터 큰 것은 93자 정도까지 되는 것도 있었다라고 한다면 대략 13m~28m정도이다.
▼ 학개마을에서 거제도를 바라본 모습
▼ 학개마을 입구의 길이를 재어 보았다. 대략187미터이다.
▼ 학개마을 포구에서 입구까지가 대략300미터이다.
▼ 학개마을옆 수치를 재어 보았다. 대략 500m이다.
▼ 포구에서 입구까지 대략435m이다. 자 그럼 위에 있는 학개마을과 수치포구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학개마을에 임진왜란당시 일본군이 상륙을 하였을까요?
▼ 지금 현재 진해 속천항에서 거제 구영리(임진왜란 당시 영등포)까지 아래와 같은 배가 운항한다. 페리선이다. 대략 1시간 소요된다고 한다.
▼ 아래 사진은 고려시대말 1281년 여몽연합군이 2차례의 일본 정벌이 실패한 뒤 1281년 10월에 남해안 방어를 위해 진을 설치할때 주둔한 군사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우물이다. 고려시대 기록을 보면 여몽연합군이 일본정벌을 위해 합포(지금의 마산)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11년전에 합포로 사용된 지명이 임진왜란때 없어졌다?
▼ 아래 사진은 웅천동(임진왜란 당시 웅천현) 옆에 있는 진해 제덕동에 있는 제포성지의 성벽이다.
▼ 제포성지는 1436년(세종18년)에 제포를 개항한 후 왜인들의 불법이주를 막기위해 1437년에 합포(지금의 마산)에 있던 해군기지(수군령절제사영-절제사는 종3품 관직)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쌓았다고 한다. 이후 1485년(성종16년)에 다시 쌓기 시작하여 1486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1437년에 합포에서 제포성지로 수군령절제사영이 옮겨왔다. 그이전에는 합포에 수군령절제사영가 있었다. 또 1437년에 합포라는 지명을 사용했다. 임진왜란이 있기전 150년전에도 합포라는 지명을 사용했다는 이야기 이다.

이상과 같이 현재 진해에 있는 합포마을에서 합포해전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학개라는 곳을 방문했는지 모르겠다. 한번만 가보면 느낄 것이다. 이곳에서 많은 함선들이 해전을 치루기에는 좁은 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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