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포해전은 마산인가 진해인가? 임진왜란



이민웅님의 <임진왜란 해전사> 81쪽을 보면
"합포는 임진장초에서 밝힌바와 같이 웅천(현재이 진해시)에 있는 합포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이은상이 <완역 이충무공 전서> 등의 저서에서 1차 출전의 두번째 해전 장소인 합포를 현재의 마산으로 비정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상황론 적으로도 거제도 북단에서 오후 4시부터 추격하여 해질녁에 상륙이 가능한 곳은 웅천 합포외에는 찾을 수 없다. 더구나 현재에도 진해시에는 합포라는 지명이 남아있디. 뿐만 아니라 임진장초에는 창원땅 마산포(고려시대의 합포)라는 지명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뭍으로 올라 도망한 일본 수군의 배를 모두 불태우는 전과를 거두었고, 밤중에 건너편 창원땅 남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라고 기술한다.
이봉수의 <이순신이 싸운 바다> 36쪽에는

"최근 합포해전을 치렀던 장소에 대해 일부 논란이 있으나 합포해전을 치렀던 곳은 마산 왜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지금의 산호공원, 즉 용마산 아래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작성한 가장 정밀한 지도인 동여도에 합포는 마산포,월영대와 함께 뚜렷이 표기되어 있으며 마산 이외의 근처 어디에도 합포라는 지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현재의 진해 근처에는 원포라는 지명이 있었을 뿐 합포는 없었다. 근자에 진해 인근에 학개(鶴浦)라는 지명이 등장했지만 조선시대의 合浦와 연결시키기에는 무리다. 합포는 임진왜란 당시 창원땅 마산포라고도 했던 곳이다." 라고 기술한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걸일까?

지도를 한번 보자
이민웅님이 이야기하는 진해지역은 지금의 진해 학계이다. 영등포에서 직선 거리로 가장 가까운 땅이 지금 현재 진해해양공원이 있는 죽곡동이다. 지도를 보시면 잘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죽곡동은 학계와 웅천사이이다. 거리를 재어보자. 영등포에서 학계와의 거리가 직선거리로 7.5km이다.
그럼 마산 용마산에서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까지의 거리가 대략 24km이다.
합포해전이 있었던 날이 1592년 6월 16일(양력)이다. 이순신장군이 오후4시경 적을 쫓아 해질녁에 도착했다고 한다. 양력 6월16일이면 해가 떨어지는 시기는 7시에서 8시경 되어야 한다. 한국천문연구원 http://www.kasi.re.kr/Knowledge/sunmoon_map.aspx 홈페이지에 가보면 마산시의 일출과 일몰에 관하여 나온다. 다만 1896년 부터 2051년까지만 나오지만 대략 알 수 있다. 몇가지 예를 보면 1990년 6월 16일 일몰시간은 19시 42분이다. 그러니까 저녁 7시42분에 일몰이다. 1896년 6월 16일도 일몰시간은 19시 42분이다. 1925년도 일몰시간은 19시 42분이다. 대략 평균 잡아서 19시 40분 전후이다. 그런데 학계는 영등포에서 출발하면 1시간 20분 정도면 도착 할 수 있다. 시간 상으로 5시 30분 전후면 도착 한다는 이야기이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노는 열네 자루다. 이 노로 1시간에 6km속도를 낸다고 한다. 그런데 판옥선은 거북선보다 2개가 많은 노를 가지고 있다. 판옥선의속도는 적어도 6km이상의 속도를 내었다 보아야 할 것이다. 학계와의 거리가 대략 7.5km이니 5시 30분 안에 도착한다. 그러나 합포까지는 적어도 4시간 정도 소요가 된다. 6월16일 해가 떨어질 때까지 적을 쫓았다면 과연 어디일까?
위의 지도는 동여도에 나타난 합포와 창원을 이야기하고
위의 지도는 정확하다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진해, 창원, 웅천을 나타낸 것이다.
위 사진은 현재 마산시 진동면사무소에 있는 진해현 동헌의 모습이다. 진해현 관아 및 객사는 1832년(순조32년) 진해 현감 이영모가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진해현과 진해현 관아를 비교하니 진해현은 지금의 진해가 아닌 마산시 진동면일대가 진해현이 맞다. 대동여지도가 1864년 완성되었다고 하니 지금 사진으로 보는 진해현이 지도상에 표현된 진해가 맞다는 이야기 이다. 동여도는 김정호가 만들었다고 하니 비슷한 시기에 만들었을걸로 생각이 든다. 동여도는 23규(糾)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나라 고지도 가운데 가장 세밀한 지도라고 한다.
그럼 진해현은 동헌을 두고 객사를 둘 정도로 어느정도 큰규모의 촌락을 형성했다는 이야기이다.

아래 사진은 진해현 당시 있었던 진해향교이다. 지금은 마산향교이다.

그리고 아래 사진은 규장각지도에 나타난 진해현과 마산, 웅천, 그리고 칠원계가 나온다.
조선시대의 마산권은 본래 창원도호부를 중심으로 칠원·진해·웅천현 등이 위치하고 있었다라고 이야기한다. 태종 15년(1415년)에 창원부는 창원도호부로 개칭되어 이 지역이 군사상으로 중요한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라고 마산시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다.
http://www.masan.go.kr/masancms/filesadmindir/book_masan_history/4/4_5_1.htm
위에 있는 서울대 규장각 지도에 나와있는 칠원·진해·웅천현의 경계가 이해가 간다. 그럼 창원은 어떠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을까? 또 창원은 지금의 창원과 어떻게 다를까? 지금의 창원은 1970년대 공업도시로서의 기능을 하기 위해 설립된 계획도시이다. 그 이전에 있었던 창원은 지금의 의창동(소답동)지역을 이야기한다.
그곳에는 읍성과 향교가 있을정도로 큰규모를 자랑했던 것 같다. 읍성은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향교는 아직도 남아있다.
▲ 풍화루라고 적힌 출입문이 보이고
▲ 공적비 같은 비석과


▲ 명륜당이 보인다.
▲ 명륜당 옆 부속건물

▲ 명륜당 뒤 부속건물

▲ 명륜당 뒤 부속건물에서 바라본 창원 소답동지역

그럼 지명에 관해서 한번 알아보자 지금의 진해와 마산 창원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없었다. 지금의 진해는 일본의 침략에 의한 1914년 11월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마산에서 진해로 이전하면서 활성화 되었고 1931년 4월 진해면이 진해읍으로 승격되면서 도시화가 이루어 졌다. 그리고 웅천은 1973년 7월 1일 창원군 웅천면 편입(대통령령 제6542호)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진해는 현재 마산시 진동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창원은 현재의 창원시 소답동 지역을 이야기 한다. 마산시 홈페이지에 나온 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창원도호부의 호수는 194호이며 인구 총수는 1193명인데 중에 남자가 4955명이고 여자가 5238명으로 진주도 안에서는 김해도호부와 진주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창원성은 성종 7(1476) 5월에 창원읍성을 수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0월에 완공을 보았는데, 성의 규모는 높이 12尺에 둘레 4410척이었다라고 한다. 창원성을 지키는 병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무렵 창원도호부의 군사 수는 모두 860명인데 숫자는 봉족의 수를 제외한 것이다.

지금의 함안군 칠원면은 고려시대부터 칠원현으로 현종 9년(1018년)에 김주(김해)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공양왕 2년(1390년)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감무를 현무로 고쳤으며 선조 25년(1592년)에 창원도호부에 합속시켰다가 광해군 9년(1617년)에 다시 칠원현으로 분리 독립시켰다. 그 후 고종 32년(1895년)에 칠원군이 되었다가 곧 폐지되고 함안에 병합되었다.

지금의 마산시 구산면은 본래 성법부곡이었는데 고려시대에 구산현으로 승격하여 金州(김해)에 예속되었다가 공양왕 때 칠원현의 속현이 되고 조선시대에도 계속해서 칠원현의 속현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의 마산시 진동면·진북면·진전면은 고려시대부터 진해현이었는데 고려 현종 9년(1018년)에는 진주에 이속되었다가 공양왕 때 감무를 설치하였다. 조선 태종 때에 현감이 파견됨으로써 령현의 구실을 하게 되었으며, 선조 34년(1601년)에는 함안에 이속되었다가 광해군 9년(1617년)에 진해현을 설치하면서 독립되었다. 그 후 인조 5년(1627년)에는 창원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진해현은 창원에 통합된지 2년 만인 인조 7년(1629년)에 창원에서 분리되어 함안군에 이속되었다가 인조 17년(1639년)에 주민들의 소청에 의하여 다시 현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그후 고종 32년(1895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가 대한제국 때인 순종 2년(1908년)에 창원군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진해시 웅동지역은 본래 신라시대의 웅구현에서 유래되었는데, 경덕왕 16년(757년)에 웅신으로 개칭되어 의안군에 편입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金州(김해)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도 한동안 김해도호부의 속현으로 있다가 문종 2년(1452년)에 웅신현·완포현·삼읍부곡 및 창원의 남산 일부를 합하여 웅천현으로 독립되었다. 중종 5년(1510년) 삼포재란을 평정한 공로로 잠시 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하였지만 곧 현으로 복귀하였으며 그후 고종 32년(1895년)에 웅천군으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웅천은 신라시대에 지금의 창원시인 의안군에 편입되기도 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창원도호부와 영속관계가 없었으며 순종2년 (1908년)에 비로소 창원군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출처: http://www.masan.go.kr/masancms/filesadmindir/book_masan_history/4/4_5_1.htm

이제 진해땅 남포에 관해서는 의문이 풀리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장계에 나와 있는 고리량은 진해땅이라고 적혀있는 것도 현재의 마산시 구산면이라 더 더욱 의문이 풀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 그럼 과연 웅천땅 합포라는 것에 관하여 의문을 풀어야 겠습니다.
▲ 위의 사진은 1973년 웅천이 진해시로 편입되기전을 표시한 것입니다. 현재의 마산과 창원은 하나의도시였고 창원군은 마산시 구산면,진동면,진북면,진전면, 창원시 북면,동읍,대산면 진해시 웅동,가덕도,등을 관장하였습니다. 진해시 웅동은 전체적인 창원군의 지역에서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일부지역만 속해 있지만 행정구역으로 창원군에 속하고 있습니다. 1973년 이전 지도가 있다면 복사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위 규장각 지도를 보면 지금의 진해땅에 가까운 것은 칠원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때도 1973년 이전처럼 분리되어서 관리한 것은 아닐까요?
▲ 그림지도는 신증동국여지승람-동람도 경상권에 관련된 고지도입니다. 진해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네요. 창원밑에 병영이라고 표시된 것은 통영일것 같네요 합성동에 있는 합포성지(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병영성). 그리고 병영옆에 있는 것은 칠원인 것 같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530년에 완성되었다. 1530년이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입니다. 그리고 위의 규장각 지도에도 칠원현이 있습니다. 칠원은 어디냐?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칠원은 현재 함안군 칠원면입니다. 그리고 칠원면 역사와 칠북면 역사에 보면 칠원면이 칠북면을 관할했다고 하는군요. 그럼 저멀리 있는 칠원에서 구산면을 관리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가까이 있는 진해현에서 관할하지 않고 칠원에서 관리 했을까요? 창원 도후부보다 멀리 있습니다. 그리고 칠원현 관리 구역이 상당히 큽니다. 위의 있는 1973년 이전 창원군에서 관리 했던 것처럼 웅천에서 합포를 관리했던 것은 아닐까요?
2편으로 이어집니다.



덧글

  • 권순삼 2007/03/19 15:30 #

    제 블로그에 오셔서 좋은 말씀 남겨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거제에서 웅천까지의 가시권 등 여러 면에서 수정하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조선군의 숙영은 당일 합포(마산 합포이든 웅천 합포이든)해전 후 숙영이 왜 남포에서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산 합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굳이 13~4km(대략)를 다시 남포로 회군하여 숙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일본군 선단이 그 일대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태라면, 마산 합포에서 숙영하고, 정찰대를 남포 쪽으로 보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데요. 5척을 분멸하기 위해서 20여 km를 추격하여 전 함대가 이동하였다는 것도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 측면과 전쟁의 관점에서는 많은 논란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만약 정찰대가 3~4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이순신에게 통보하고, 이순신이 움직이면서, 일본군이 마산 합포로 도망가더라도 판옥선의 속도를 감안하면 그렇게 빨리 추격하지는 못했을 것이라 봅니다. 예전에는 시간을 2시간 간격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오후 4시라는 것은 3~5시 사이라는 것을 조현근님도 잘 아실 겁니다. 추격 시간이 3시가 될 수도 있고, 5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5시라 한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인 경우에는 한여름철이기 때문에, 풍랑도 고려해야 합니다. 설사 당일이 맑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제가 웅천 합포에서 조선 수군이 숙영하지 않고 남포로 간 것을 얘기한 것은 웅천 합포 땅이 좁아서 그리된 것이 아니라, 거제도 칠천량과 남포 중에서 왜 남포쪽으로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책에서, 그 다음날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마산포를 지나 현재의 진해 쪽 섬을 지나 저도(조현근님이 생각하고 저도 또한 조현근님 덕분에 수정한 구산면 저도)를 지나 적정포로 향했다고 했습니다(나중에 정확한 것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합포에서 분멸한 5척 외에 다른 일본군이 현재의 마산 합포 쪽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남포로 이동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도에서 보면 남포는 거제도 방향과 웅천 방향, 그리고 현재의 마산 방향으로 정찰 가시권이 들어오거든요.
    현장 답사와 자료 추적을 통해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는 계기가 서로에게 되었으면 합니다.
    수고하십시오.
  • 팬저 2007/03/19 16:02 #

    남포에서 숙영을 한이유는 잘모르겠지만 2가지 이유인것 같습니다. 첫번째로는 육지의 일본군세력이 어디있는지 잘모르는 이유가 되겠고 일본군의 기습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조 25년(1592년) 9월 24일(음력) 일본군이 창원성으로 공격을 하여 3일만에 점령을 합니다. 그만큼 육지의 상항이 불리하지 않았나 싶네요. 두번째로는 합포지역보다는 남포지역이 안전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육지에서 남포를 가기위해서는 구산면 반동을 지나야 되는데 반동지역이 바다라면 남포지역은 섬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수군의 입장에서는 반동지역만 경계하면 수월하게 하룻밤을 지새울 것 같네요. 이건 전부 제 생각입니다. 5척을 분멸하기 위해서 20여 km를 추격하여 전 함대가 이동하였다는 것에 관하여는 저도 잘모르겠습니다. 육지의 상황 내용 중 창원성전투는 합포해전이 끝나고 4개월 뒤입니다. 합포해전이 있었던 곳에서 남포까지는 대략 16~18km 정도인데 숙영을 하기 위해 먼거리를 갔다는 점은 저도 의문이 남습니다. 시간으로 대략 3시간정도 인데 그점은 잘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웅천 합포에서는 대략 9~10km 정도입니다. 시간상으로 1시간 30분에서 1시간 50분 정도 소요됩니다. 음 이걸 어덯게 풀어야 될까요? 저도 이부분은 의문이 많이 드네요. 해전이 벌어진 시간이 대략 7시30~40분이라면 1시간 전투가 있었다해도 8시 30분정도 그리고 이동.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대략 3시간(마산기준) 그러면 11시30분에서 12시 정도 그럼 많이 피곤했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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