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 그 비밀을 찾아서_01 읍성(邑城)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많이들 찾아가는 낙안읍성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저도 이번에 4번째인데 읍성에 관해서 혼자 연구하기전까지는 그냥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 주는 낙안읍성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낙안읍성에 관하여 좀 더 알아보고자 지인과 함께 찾아간 낙안읍성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낙안읍성에 관하여 좀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것도 있고 복원된 낙안읍성의 잘못된 것에 관하여 알고자 하는 것도 있다. 다만 글을 적는 나 또한 아마추어라서 틀린 부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보시고 이상이 있거나 잘못된 점이 있으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 아래 지도는 광여도에 나온는 낙안군 낙안읍성입니다. 지금은 순천시 낙안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낙안군이었습니다. 낙안읍성은 동,서,남문과 함께 사각형으로 형태를 이룬 읍성임을 알 수 있으며 읍성안에는 아사와 창, 객사가 있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 여지도에서 본 낙안군 낙안읍성의 지도입니다. 금전산의 진산을 두고 낙안읍성이 조성되어져 있는데 위 지도와 다르게 성곽위에는 여장이 둘러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다만 위 광여도 지도와 아래 여지도에서 차이점이라고 하면 남문,동,서문입니다. 광여도에서는 성문주위에 테두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평거식방식의 성문으로 보이고 아래지도 여지도에 나오는 성문은 개거식성문입니다.
▼ 해동지도에 나오는 낙안읍성입니다. 해동지도의 특징은 고을을 연결하는 도로가 잘 표시되어 있다는 것과 함께 광여도와 여지도를 합쳐놓은 느낌이 듭니다.
▼ 1872년 지방지도에 나온 낙안군 낙안읍성의 지도입니다. 가장 자세하게 나온 지도가 지방지도인데요. 사각형의 읍성과 함께 각 관아들의 위치까지 나와있습니다. 동헌과 객사주위에 담장이 있으며 객사옆에 군기고가 있네요. 다만 치성들이 보이지가 않네요. 지방지도에 보면 각 성문의 방식은 평거식방식으로 된 성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아래 지도는 조선시대 당시 있었던 여러 읍성들을 표시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읍성들은 대부분 성곽의 일부가 남아있거나 사라지고 없는데 진주읍성과 낙안읍성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진주읍성또한 복원을 하였고 낙안읍성도 복원을 하였죠. 낙안읍성이 아직까지 남아있었던 것은 일제시대때 철도가 지나가지 않았던 것이 남아있게된 주요한 원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철도말고도 도시의 개발화에 의해 무너진것도 되겠는데 낙안읍성은 이것 또한 비켜간 것이 남아있는 원인도 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 순천시의 마크는 낙안읍성을 이용한 마크더군요.
일단 순천시 낙안읍성 홈페이지를 보면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서 면적 41,018평으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虎患)이 잦아 폐쇄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으로서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瓮城)이 성문을 외워 감싸고 있다. 여장엔 활을 쏠 수 있도록 사방 1尺정도의 총안(銃眼)=사구(射口)가 있고 이 총안 역시 근총(近銃)과 원총(遠銃)으로 나누어 있다. 또 여장이 타구(朶口)로 나뉘어 있고 성곽을 따라가면凸 형의 성곽이 있는데 이는 치성(雉城)이라고 한다. 당초 6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곳만 남아 있다. (일부 복원함) 이 치성은 초소(망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그 동안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특히 6.25사변 이후 많은 훼손을 가져왔으나, 1983년 6월 14일 성과 마을(동내리, 남내리, 서내리)이 국내 최초로 함께 사적지(사적 제302호)로 지정이 되면서 1984년부터 3∼4년에 걸쳐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여장은 동문(낙풍루), 남문(쌍청루) 주변만 복원된 상태이고, 서문(낙추문) 옆 성곽에도 여장이 복원될 계획으로 있다."라고 적혀있다. 또 "1983년 6월 14일 사적지로 지정된 이후 1984~2005년까지 성곽 보수(補修) 1410m, 문루(門樓-동문(樂豊樓), 서문(樂秋門), 남문(雙淸樓) 복원(復元) 3동(棟), 동헌(東軒) 내아(內衙) 복원 5동, 평석교 석구(平石橋 石拘) 복원 1개소, 객사(客舍) 복원 1동, 해자(垓子) 복원 1식(式), 장터 난전(亂廛) 조성 8동, 공개전시가실(公開展示家室) 3호(戶), 민가 보수 94호, 민가철거보상 98호, 임경업 장군 비각(林慶業 郡守 碑閣) 보수 1동. 향토미술관 설치 1식, 전통민가 신축 4동, 전통음식 판매점4동,옥사복원1동,주도로포장3.7km,전문대문보수75개소등 보수 복원사업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83년 부터 복원한 3대문의 문루를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 아래사진은 낙안읍성입구의 사령기와 초가담장
▼ 낙안읍성 입구에서 본 화장실로 초가담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기존에 보아왔던 화장실과 달라서 그런지 정겹기까지 합니다.
▼ 낙안읍성에서는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데 시간이 된다면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낙안읍성의 설명문을 한번씩 읽어보고 들어가는 센스가 필요할 것입니다.
▼ 낙안읍성의 전경도로 낙안읍성의 전체적인 모습과 함께 낙안읍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낙안읍성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구를 들어서면 제일 처음 맞이하는 것이 동문인 낙풍루입니다.
▼ 그러나 낙풍루보다 먼저 앞에 있는 것이 석구(石狗)인데 구는 한문의 개狗자로 돌로된 개가 되겠네요. 석구는 낙안읍성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합니다. 석구와 비슷한 것이 부산에 있는 경상좌수영지에 있는 박견과 같은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좌수영지에 있는 박견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져 있는데 낙안읍성에 있는 석구는 정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낙안읍성의 안내판에는 석구는 풍수지리에 의한 멸악산과 재석산, 금전산의 기를 누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보다 왜구들의 침입을 막고자하는 뜻이 포함된 경상좌수영지에 있는 박견과 같은 뜻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읍성의 축조는 고려말부터 많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남해안 주위에 있는 요지에 읍성을 만들었는데 이때 왜구들의 침입을 막고자 하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석구의 의미는 풍수지리의 승격보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석구의 모습은 삽삽개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 부산시 수영에 있는 경상좌수영지에 있는 박견의 모습으로 낙안읍성에 있는 석구와 달리 개의 형상이 잘나타나 있다.
▼ 낙안읍성에는 해자가 남아있는데요. 해자는 적의 공격을 멈추기 위한 일종의 도랑과 같은 것인데 폭은 4미터정도 되어 보였습니다. 일본의 해자는 물을 채우고 있는 것에 반하여 한국의 읍성의 해자는 물이 흘러가는 방식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해자에는 뽀족한 나무로 된 목익을 군데 군데 심어서 해자를 건널때 발을 공격하여 공격을 못하게 하게끔 되어있는데 낙안읍성에도 이런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관광지라서 그런지 목익을 심어놓지는 않았습니다.
▼ 경남 진해시에 있는 웅천읍성에서 발견한 목익입니다. 목익은 대략 70센치 정도 되어보입니다.
▼ 낙안읍성 낙풍루앞에 있는 돌다리입니다. 해자를 건너기위한 다리로 평석교라고 하는데 예전에 정월 대보름날 자기 나이대로 이 다리를 건너면 일년 내내 다리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해서, 다리 밟기를 하던 곳입니다. 본래의 돌다리는 1961년 사라호 태풍 때에 떠내려 갔는데, 읍성을 복원할 때 다시 놓았다고 합니다.
▼ 해자의 깊이는 대략 60센치 이상되어 보였는데 실지 해자의 높이는 이보다 더 높았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아무래도 해자의 높이가 1미터 이상되어야 적의 입장에서 공격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낙안읍성의 해자는 우리가 주의에서 보는 도랑과 같은 방식으로 복원한 느낌을 받습니다. 진해시 웅천읍성의 해자인 경우 3단으로 된 해자이며 높이 또한 1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데 낙안읍성의 해자는 그런 느낌을 주지 못하네요.
▼ 낙안읍성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보이는 옹성인데요. 옹성은 적의 공격이 집중되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이 성문앞에 설치되어 있는 것인데요. 보통 반원형의 옹성으로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낙안읍성의 옹성은 드물게 ㄷ자로 된 옹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리되면 적은 성문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먼저 옹성을 제압해야 성문으로 진입을 할 수 가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보는 사극에 보면 성문만 있고 옹성은 나오지가 않습니다.(물론 옹성이 없는 곳에서 촬영을 해서 그렇지만요)
▼ 낙안읍성의 옹성을 보면 가장 밑에 땅위에 큰 돌들이 성곽을 받치고 있는데 이를 기단석이라 부릅니다. (작아서 안보일 수 있습니다.)기단석은 성벽을 받쳐주는 돌로 이부분이 흐트려지면 성벽은 뒤틀리거나 무너지기 쉬울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 낙안읍성의 옹성위에 사령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낙안읍성의 깃발은 수원화성의 깃발과 달리 여러 색상의 깃발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수원화성의 깃발은 동서남북을 상징하는데 낙안읍성의 깃발은 무엇일까요?
▼ 낙안읍성의 동문에서 남측방향을 바라본 성곽으로 여장과 함께 치성이 보입니다.
▼ 낙안읍성의 동문이며 누각은 낙풍루입니다. 낙풍루는 1983년부터 복원하면서 복원을 하였는데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첫째 위 고지도에 보면 동문을 그려 놓은것을 보면 평거식방식의 누각인데 낙풍루는 개거식방식의 누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복원을 하면서 이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제가 잘못 추측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고지도가 틀린 것일까요? 또 두번째로는 누각을 지탱하는 육축이 너무나 작고 벽돌과 같은방식으로 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육축은 누각부분이 취약한 부분이라 돌중에서 가장 큰돌로 육축을 만든다고 하던데 여기에 있는 낙안읍성의 육축은 너무나 빈약한 느낌을 받습니다. 얼마전에 복원한 경남 김해시의 김해읍성의 북문을 보는 것과 차이가 나는군요.
▼ 1872년 지방도에 나온 낙안읍성의 지도로 성문을 보면 평거식방식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평거식방식의 성문인 강화산성의 성문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평거식이냐 개거식방식이냐에 관해서는 2편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 복원된 김해읍성의 육축의 모습으로 낙안읍성의 육축과 비교하여 보면 확실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 낙안읍성의 여장부분입니다. 여장은 적의 화살이나 총알을 막기위한 일종이 방패와 같은 곳으로 보통 성문주위에 설치를 많이 하고 있더군요. 여장안에 구멍이 있는 것을 총안이라고 하는데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근총안이고 원거리 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은 원총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장과 여장사이를 타구라고 부릅니다.
▼ 사진에 보시면 여장위에 조금 돌출된 것이 보이는데 이를 옥개석이라 부르며 여장 밑에 있는 것은 미석이라고 부르는데 미석을 성벽과 여장 사이에 끼워놓은 이유는 선조들이 물질이 상태가 변화할 때 부피가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이 얼면 부피가 팽창한다는 것을 잘 안다. 만약에 성벽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든 채로 겨울을 지내다보면 물이 얼어 성벽이 쉽게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석을 끼워놓으면 비나 눈이 와도 물이 성벽으로 스며들어가지 않고 미석을 타고 바로 땅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 낙안읍성의 옹성에 대한 의문점이 하나더 있는데요. 다른 곳과 달리 ㄷ자형의 옹성이라고 이야기 하였는데 이상하게 옹성이 길이가 길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좀 더 길게 만들지 않고 낙풍루누각과 가깝게 만든 이유가 뭘까요? 적의 입장에서는 옹성을 무시하고 바로 성문으로 공격하기 좋은데 말이죠. 안내하는 아가씨를 기준으로 보면 성곽의 면석들이 상당히 크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큰 성돌은 1미터 이상되어 보입니다. 성돌은 위로 가면서 점점작아지는 방식인데 이는 조선초기 읍성의 전형적인 방식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또 성곽은 잔돌끼움방식으로 축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옹성안으로 들어와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ㄷ자로 된 옹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원형의 옹성이 아닌 왜 ㄷ자형식의 옹성일까요? 이것도 궁금하네요.
▼ 성문으로 철엽이 되어있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방식은 적의 화공에 취약할 수 있는 구조인데 왜 철엽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또 화강석으로 된 초석이 사각형으로 되어있습니다. 예전의 방식들은 둥근형식으로 된 것들이 많았는데 복원하면서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더군요. 초석은 자연스럽게 되어있는 것에 비하여 너무나 각이 진 초석으로 되어있어서 한국의 美인 자연스러움이 묻어나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 복원된 김해읍성의 북문으로 성문주위에 얇게핀 쇠로된 것이 성문을 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적의 총과 화공에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낙안읍성에는 없더군요.
▼ 낙풍루의 현판과 단청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낙풍루는 순조34년(1834) 진사 김호언이 사재 1,400냥을 들여 증건하였다고 합니다. 문루는 무너지고 성벽 사이로 터만 남아 있었는데 1987년에 복원하였습니다.
▼ 낙풍루의 뒷에서 본 것으로 복원하였다는 것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아무래도 초석때문에 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낙풍루 봄을 상징해서 풍년을 기원하는 뜻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 이제 성곽을 오르기 위해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립니다. 성곽의 성돌들은 상당히 큰 돌로 내축하였습니다. 낙안읍성의 성곽은 협축방식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계단과 여장부분의 사진으로 외축보다는 작은 돌로 되어있는 것이 보입니다.
▼ 계단부분의 성돌과 비교하여 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낙풍루의 옆모습으로 잡상도 없이 아주 깨끗하게 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 낙풍루에서 본 여장의 모습입니다. 보시다시피 여장이 누각을 다 보호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여장의 회각로에서 본 낙풍루입니다. 여장의 회각로 바닥에는 시멘트로 마무리 되어있어서 조금은 의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와서 보호 차원에서 그렇게 했겠지만 고창읍성처럼 흙과 풀로 마무리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편에서는 동측에서 북측으로 그리고 서측성곽을 따라서 가면서 느낀점을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핑백

  • 까마구둥지 : 낙안읍성 - 조선시대를 여행하는 느낌. 2011-05-05 06:43:06 #

    ... 성 낙안읍성 홈페이지 한 기자의 역사관이 돋보이는 기사입니다 낙안읍성 역사자료관에 벌교는 없다? 읍성에 관한 전문지식이 돋보이는 팬저님의 낙안읍성에 관한 포스팅 낙안읍성 (1) 미니어쳐 ... more

  • 팬저의 국방여행 : 낙안읍성 옹성이 왜 이렇게 작지? 2012-11-09 18:07:30 #

    ... 인 낙안읍성은 어찌보면 고증과 거리가 먼것 같습니다. ㅠㅠ 그나마 있는 낙안읍성을 제대로 복원을 하면 좋을 것을 이런식이면 곤란한데 말이죠. 낙안읍성 그 비밀을 찾아서 _01낙안읍성 그 비밀을 찾아서 _02낙안읍성 그 비밀을 찾아서 _03 낙안읍성 그 비밀을 찾아서 _04낙안읍성 그 비밀을 찾아서 _05낙안읍 ... more

덧글

  • 유진우 2008/07/02 15:55 # 삭제

    아무래도 급하게 복원을 하다보니 그런 탓도 있을 듯 합니다.
    일단 예산과 공사기간 단축은 건축의 필수조건이니까요. 대전의 보문산성도 발굴조사한 지 불과 1년 만에 300m 구간 대부분의 복원이 완료되는 전광석화, 전격전 복원을 보여준 예가 있습니다.
  • 팬저 2008/07/02 23:38 #

    이런 부분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빨리 지어지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것을 시행하는 시청,군청,구청 등에서 자문기구나 전문 공무원이 없은 이유도 있겠죠. 또 한부서에 오래 머물다 있지 않고 인사이동이 되다보니 그 분야를 공부하다보면 인사이동이 되는 것도 이유일 것 같습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구글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