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성2 읍성(邑城)



▼ 북문에서 출발하여 동측방향을 가면서 처음으로 만나는 치성으로 담쟁이 나무가 있어서 그런지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제가 아는 분이 이야기 하기를 "조선시대때 읍성은 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지금의 읍성은 주민들이 가꾸고 보호해야 한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맞는 이야기 갔습니다.
▼ 가까이 가서 본 치성입니다. 치성의 아래부분의 면석들은 조선초기 읍성의 방식을 따라 만든 것 같습니다.
▼ 치성에서 본 북측 체성으로 여장이 없더군요. 치성도 그렇고 체성도 그렇고 여장이 없던데 여장이 없는 곳에 있는 병사들은 전투시 심리적 압박이 상당할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신체가 다 노출이 되니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여장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은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 고창읍성은 야간 경관을 위해 조명을 비추었더군요.
▼ 성곽의 높이는 4미터 정도 되어 보이더군요. 성곽의 폭은 대략 1미터정도 되어 보였습니다.
▼ 북측성곽을 보면 야산을 올라오기 위해서는 가파른 산을 오르고 다시 북측성곽으로 올라와야 하기때문에 공격측에서는 상당한 피해를 감수하고 공격해야 되는 상황입니다.
▼ 치성에서 북문인 공북루 방향을 바라본 모습으로 북문에서 이곳 치성으로 오려면 가파른 경사를 극복하고 와야 합니다.
▼ 채성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모습으로 회각로 부분에 흙으로 되어있어서 각종 식물들이 심어져 있더군요.
▼ 성곽의 내탁부분은 외탁과 달리 흙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석청의 축성 방식인 편축식방법으로 고창읍성의 성곽을 쌓았다는 증거입니다.
▼ 멀리 동측 성곽과 함께 누각이 보입니다. 여기가 고창읍성 사진찍기 좋은 곳이라는 푯말이 있습니다.
▼ 동측 누각인 등양루는 좀 실전적이고 전투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 등양루는 다른 누각과 달리 숨어서 활이나 총을 쏠수 있게끔 두터운 나무판자가 달려있어서 방어자의 입장에서는 심리적 압박이 덜 할것으로 생각이 들더군요. 그냥 뻥 뚤린 누각보다는 이러한 부분들이 누각에 많이 사용되었을 것 같은데 이런방식의 누각은 처음 보았습니다.
▼ 등양루의 협축은 큰 협축옆에 또 작은 돌들을 끼워놓은 방식인데 낙안읍성의 누각도 이런 방식으로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방식이 맞는 것인지 아닌지 헷갈립니다. 하지만 고창읍성의 등양루에 사용한 협축방식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성문에 철엽이 없는 부분은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 카메라를 확대를 해보았는데요. 등양루라는 현판밑에 판문이 있는데요. 판문을 통해서 적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고개만 내 밀 수 있는 방식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동문 옹성을 들어오기 위한 곳인데 폭이 대략 3~4미터 되어 보입니다.
▼ 담쟁이 나무가 가려져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간에 보면 누혈이 있는 것이 보입니다. 누혈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이 흔들려서 올리지 못합니다. 누혈은 성곽에 고여있는 물이나 비로 인해 물이 빠져 나갈 수 있게 만든 배수구라고 보시면 됩니다.
▼ 등양루를 복원하면서 적어놓은 글
▼ 등양루안에서 본 옹성의 모습입니다.
▼ 등양루옆에서 본 옹성으로 옹성의 높이와 회각루의 넓이를 알 수 있는 사진입니다.
▼ 등양루에서 본 치성의 모습으로 체성은 황토로 된 흙이 윗부분을 덮고 있습니다.
▼ 고창읍성의 사진에 많이 나오는 등양루의 모습으로 체성과 등양루 옹성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나오는 곳이라서 많이 찍는 것 같습니다. 야간에 조명을 받고 있는 고창읍성의 풍경은 보기가 좋은 것 같습니다.
▼ 치성을 지나 남측방향을 가는 체성입니다.
▼ 체성은 직선이라기 보다는 산의 형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성곽을 돌다 보면 성벽 아래 글자가 새겨진 돌들이 박혀 있는데 이는 고을 표지석이다. 고창읍성은 고창사람들뿐만 아니라 김제·담양·함평·제주 등 19개 고을 사람들이 참여해 쌓았다고 합니다. 성을 쌓고, 자신들이 쌓은 성벽에 고을 이름을 새겨 두었습니다. 이는 지금으로 말하면 실명제인데 자기가 맡은 곳의 성벽이 무너지면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한 것으로 다른 읍성에는 성곽을 쌓은 사람의 이름도 적어 놓곤 했습니다. 오랜 세월 지나며 그 흔적이 보이지 않자 문헌과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1997년에 고을 표지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을 이름이나 사람 이름을 적어 놓는 돌들을 표석이라고 합니다.
▼ 또 다시 남측방향으로 가다가 만난 치성으로 앞에서 본 치성과는 다르게 돌들이 줄을 선 것처럼 되어있습니다. 이는 최근에 치성을 만든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치성에서 본 노동지 저수지입니다.
▼ 최근에 조성해서인지는 몰라도 앞에서 본 치성과 다르게 꽃과 풀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덧글

  • 유진우 2008/07/02 15:48 # 삭제

    저렇듯 구간별로 표석을 해둔 이유는 나중에 성곽이 붕괴되기라도 하면 바로 즉결처분하기 위한 구실도 됩니다. 해미읍성 성벽 구간에도 저렇듯 표식을 한 돌들이 쌓여 있습니다.
    고창성을 쌓을 당시 성돌은 가급적 주변의 것을 동원하다 보니 석재 중에는 당간지주들도 섞여 있습니다. 이는 사찰이 많았던 경주성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죠
  • 팬저 2008/07/02 23:39 #

    예 표석은 실명제라고 봐야하는데 3년안에 성곽이 무너지지 않으면 포상을 하고 성곽이 무너지면 그곳에 성곽을 쌓자고 한 사람과 성곽을 쌓은 사람들의 잘 잘못을 따지겠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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