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성1 진성(鎭城)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던 부산진성 전투에 관한 사항들은 많이 있지만 정작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을 찾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임란후 부산왜성을 지으면서 부산진성의 돌들을 가지고 가서 부산왜성을 쌓았고 또 임란후 부산진성은 임란전에 있었던 부산진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을 했기 때문이다. 부산진성을 논할때 3개의 부산진성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첫째가 임란전의 부산진성 두번째가 조선후기의 부산진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의 부산진성이다. 모두다 위치가 틀리기 때문에 이렇게 편의상 나누어 본다. 물론 임란때의 부산진성은 사라진 시기까지 포함하면 4개로 나눌수 있겠지만 시기가 얼마되지 않아서 임란전의 부산진성으로 포함해본다. 이번 부산진성소개 글에서는 조선후기때의 부산진성에 관한 자료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성곽사진들은 현재의 부산진성을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현재 부산진성보다는 부산진지성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는 부산진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부산진성(釜山鎭城)은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473번지 정공단(鄭公壇) 일대에 있었다. 지금의 정공단 외삼문 위치가 부산진성의 남문터가 된다.

부산진성이 성으로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490년(성종 21년)에 축성된 이후이다. 성의 둘레가 280여간(間)의 작은 성으로 바닷물이 성문 가까이 밀려들었다. 임진왜란(1592) 당시에는 바닷가에 성에 이르는 사이에 방어의 목적으로 목책과 성벽 주위에는 해자가 설치되어 있었다. 목책은 적의 전선이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을 저지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는데 진해 제포와 통영 산양면의 당포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 아래 그림지도를 보면 현재의 부산진성은 자성대주변이고 자성대 주변을 기점으로 하늘색으로 된 성곽이 조선후기의 부산진성이다. 그리고 왼쪽 일신기독병원위가 임란전의 부산진성이다. 임란전의 부산진성의 성곽추정도와 부산왜성의 성곽추정도는 제가 임의로 그린것으로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임란전의 부산진성과 부산왜성에 관한 내용들이 나오면 다시 수정하여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임란후 자성대왜성을 포함하여 만든 것이 임란후의 부산진성인데 지금의 부산진성과 비교하면 면적이 상당히 큰편임을 알 수 있다. 임란 후 부산진성의 성곽은 1912년 일제의 의해 측량된 지적원도를 기준으로 우리문화재연구원에서 작성한 도면을 다음지도에서 제가 다시 작성한 것으로 오차범위는 얼마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성곽도면들의 저작권은 모두 우리문화재연구원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아래 조선후기 부산진성을 기준으로 보면 성문이 4개와 암문이 1개가 있으며 영가대가 부산진성 바로 옆에 있음을 알 수 있고 자성대왜성이 부산진성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동헌의 장소는 현재 부산진시장이며 객사는 현재 부산진성의 서문앞임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때의 서문에서 현재의 부산진성 서문까지의 거리차이는 직선거리로 대략 240미터 정도 되며 조선후기때의 동문과 복원된 동문과의 거리차이는 직선거리로 대략 40미터정도이다. 또한 조선후기 영가대는 지금 현재 범일역에서 부산진역으로 가는 철로변임을 알 수 있으며 예전 영가대와 복원된 영가대와의 거리차이는 직선거리로 대략 470미터 정도된다. 또 지도에 푸른색으로 된 지역은 조선후기때 모두 바다였음을 표기하였다.(그림을 클릭하면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서문을 놓고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인터넷에서 보았는데 지적원도를 기준으로 보면 위 그림지도에서 나오는 것처럼 진시장 옆이 맞을 것 같다. 성남초등학교에 서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 알려진 것으로 보이며 아래 그림지도에도 나오지만 진시장 앞길은 남북으로 큰길이 연결되어 있지만 뒷길은 사선으로 이어져 있다. 도시계획을 하면서 일부러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이된다. 이는 예전부터 길이 있거나 인공적인 무엇이 있었기때문일 것이다. 인공적인 것이 바로 부산진성의 성곽일 것이다. 지도상에 서측 옹성이라고 표시한 부분은 제가 추측한 것으로 골목길이 옹성의 모양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전부터 있었던 곳에 집을 짓다보니 골목길 또한 옹성의 모양을 따라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의 읍성이 있는데 경남 창녕의 영산읍성을 보면 서문주위가 옹성모양을 따라 골목길이 형성됨을 알 수 있고 창원읍성의 경우 남문을 따라 형성이 되어 있어서 부산진성의 경우도 위와 같은 방법일 것으로 추측이 된다. 또한 녹색으로 된 집들이 똑 같은 크기와 방향을 두고 형성된 것으로 보아 부산진성의 서측 성곽을 두고 집을 형성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 지적원도 기준을 보고 남문을 추측한 것으로 지적원도를 보면 남측성곽은 직선이 아니고 조금은 오목하게 형성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도를 보니 집들이 길을 따라 직선으로 형성이 되지 않고 오목하게 집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지적원도에서 표시된 남측성곽이 파란색으로 된 집들 옆으로 연결되었으며 성곽을 따라 집들이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같이 성곽이 오목하게 둥글게 축성한 것은 바닷물이 만조시 성곽안까지 들어오는 것을 고려하여 축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 북문의 경우는 부산은행본점을 가운데를 질러서 가는데 모서리 부분에 치성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북문주위로 대형 빌딩들이 들어서 있어서 북문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을것 같다. 세월이 지나 다시 건물을 지을때 발굴조사를 해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을 클릭하면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동문과 복원된 동문과의 거리가 가장 가깝게 복원이 되었지만 성문의 방향이 틀림을 알 수 있다. 동측 성문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집은 삼각형으로 된 집이라 특이하더군요. .(그림을 클릭하면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위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성곽배치도를 보면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동안 보았던 각종 진성과 다르게 성곽이 배치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아래 그림을 보면 각종 진성들의 성곽 배치도가 나오는데 진성들은 장소는 틀리지만 성곽은 모두 타원형에 가까운형태의 성곽배치도입니다. 읍성과 달리 진성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고려해야 하며 포구에 정박할 수 있는 전선들이 있어야 하기때문에 읍성과 산성과 달리 성곽의 배치가 틀리는 것이 사실이고 수군들이 적기때문에 방어에 유리하도록 타원형에 가깝게 성곽을 축성했던 것과 달리 후기부산진성은 그렇게 축성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산진성은 구포왜성의 배치도처럼 직선과 함께 ㄷ자 또는 ㄱ자 형태의 성곽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북문인 구장루를 보면 더 더욱 그렇고 또한 동문인 진동문을 보면 이러한 현상이 자주 발생됨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 발굴조사와 문헌연구 등이 이루어지면 더 자세히 알겠죠. 하지만 제 생각에는 후기 부산진성을 축성하면서 왜성의 장점과 조선수군 진성의 장점을 이용하여 조선진성에 적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울산왜성,순천왜성,서생포왜성의 전투를 통해 왜성의 수비의 장점을 안것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산진성은 자성대왜성을 기점으로 성곽을 조성했으며 자성대왜성을 본성으로 하여 그대로 부산진성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동안 보았던 조선수군의 진성과 달리 본성과 외성의 개념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 지금부터 아래에 나오는 사진들은 모두 현재의 부산진성에 있는 성문과 성곽들이며 위에서 나온 조선후기 부산진성과는 관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부산진성의 경우 일제시대의 성이 철거되고 시가지 확장을 위한 매립공사로 인해, 지금은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으며 1974년에 동문·서문·장대를 신축하여 동문은 건춘문, 서문은 금루관, 자성대위의 장대는 진남대라고 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여 오고 있다. 아래 지도를 보면 현재 복원된 동문과 서문 그리고 영가대이외에는 성곽이 복원된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빨간색을 된 것이 자성대왜성의 표시로 다음에 자성대왜성을 할때 적도록 하겠습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 서문이 만들어진지도 어언 30여년이 지났네요. 서문인 금루관에는 판문이 있는 것이 보입니다. 또한 서문의 경우는 홍예식으로 되어있으며 여장의 경우 근총안만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부산시 지정 기념물안내석
▼ 현재의 부산진성 성곽 안내도로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성곽배치도와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상당히 많이 축소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서문 성곽우주석의 성곽 입석연대는 사료에 나타난 것이 없어 확언할 수 없으나 자성대 서문의 양측 성곽에 끼여 있었으므로 임진왜란 후 부산진성을 축조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부산진성 서문의 자리였던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었는데 1975년 부산시에서 정화사업을 벌여 서문인 금첩관을 복원함에 따라 이전하였다.(위에서 이야기 하였지만 서문의 경우는 인터넷에 알려진 내용과 많이 틀림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서문이 성남초등학교로 알려졌는데 이건 잘못 알려졌고 성남초등학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성의 남측에 있다는 뜻으로 성남초등학교인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 하였던 것처럼 부산진성 남문자리가 성남초등학교 위이며 서문에 있었다면 조금위에 철거하면서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놓았두었던 것을 후세에 이렇게 전해져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래쪽에 나오는 조선시대 그림과 1905년의 사진을 보면 성남초등학교 자리가 서문이었다는 사실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 이 석주는 좌측은 높이 272cm 폭 46∼94cm이며, 우측은 폭이 277cm에 높이 62∼71cm이다. 석주 양측에는「남요인후」「서문쇄약」이라하여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되는 남쪽국경이라,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이 적혀 있어 임진왜란 후 왜적을 크게 경계한 당시 시대적 정신을 표상한 유물이기도 하다.
▼  이성린(李聖麟), ‘사로승구도’(사路勝區圖), 1748년경. 옛 부산포 경관이 봄날의 정취가 흐드러진 매우 아름다운 절경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 앞쪽에 영가대 선착장과 그 뒤로 부산진성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을 통해 보면 지적원도에 의한 부산진성이 상당부분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앞에 바위처럼 보이는 곳이 영가대이며 앞은 선착장이고 바로 뒤가 서문이다. 즉 서문은 영가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뒤가 북문인 것 같다. 그리고 자성대 방향에 보이는 것이 동문으로 추정이 된다. 서문과 동문사이에 아주 작게 남문을 표시했는데 그림을 클릭하여 크게보면 알수가 있다. 다만 남문의 방향이 바다를 바라보기는 하지만 지적도에 나온 것과 달리 다르게 되어있다. 성문은 모두 홍예석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성벽의 높이는 5미터 정도 되어 보이며 서문과 북문의 경우 1층 누각임을 알 수 있다. 또 동문근처에 객사가 있는 것 같고 각종 관아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가대 앞에 채성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남문보다 서문이 주출입구였음을 알 수 있다.(그림을 클릭하면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 김윤겸의 영가대라는 작품으로 영가대와 부산진성에 관하여 자세히 잘나와있다. 그림 앞에 선착장이 보이고 선착장에는 전선들이 보이며 바로 뒤로 영가대가 보인다. 영가대뒤로 서문이 보이는데 서문의 성문은 홍예식이고 1층 누각을 가지고 있다. 사로승구도와 마찬가지로 서문에서 북문까지의 서측성곽은 s자형태로 성곽이 이어져 있으며 사로승구도와 달리 서문은 서측성곽의 끝부분에 보인다. 그리고 남문의 경우는 바다와 인접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남측의 성곽은 직선이 아니고 S자형태로 채성이 이어져 있으며 동문의 경우는 보이지가 않는다. 남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누각이 보이는데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김윤겸의 '영가대'와 이성린의 ‘사로승구도’를 보면 1913년 나온 지적원도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문은 바로 바다와 인접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알려진 현재 성남초등학교가 서문이었다고 하는 사실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림을 클릭하면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  1905년 경의 부산진성 부근의 모습 사진출처 <부산광역시 중구 발행 「기록사진으로 보는 부산·부산항 130년」도록에서>
1905년 경부선 개통 이후의 모습으로 영가대부분에 철길이 놓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뒤에 조그마한 산이 자성대이며 서문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 위 사진을 가지고 서문과 영가대 등을 표시한 것이다. 인터넷에서 나오는 서문의 위치가 성남초등학교였다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인터넷에서 한번 글이 올라오면 확인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많이 퍼지다 보니 이러한 결과가 생긴 것 같다.

▼  서문인 금루관이라는 현판이 보이며 옹성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서문앞에 홍살문이 있고 서측성곽을 따라가다 남측성곽을 가는 부근에 장대가 보인다. 그리고 서문에서 남측성곽이 지나가는 곳은 얼마되지 않음을 알 수 있고. 서문인 금루관은 1층 누각이며 앞에 성벽에 수로가 보인다.
▼  비슷한 방향에서 바라본 자성대부근으로 서문이 보이며 영가대부근에서 촬영하였다.
▼ 부산진성의 수구의 모습으로 물은 흐르지 않게 되어 있었습니다.
▼ 금루관의 모습인데 여장에는 원총안은 보이지 않고 근총안만 있는 것이 보입니다.
▼ 화강석으로 일정하게 잘라서 성곽을 축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의 왜성의 축성방법과 비슷하게 면도칼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틈입니다. 요즘 복원축성하는 우리나라 성곽의 경우 이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데 70년대 축성한 방식이라 이런 것 같습니다.
▼ 정면에서 바라본 육축의 모습
▼ 원산의 모습이 보이는데 인위적인 가공이 많이 되어있는 것 같네요.
▼ 서문에서 정면을 본 것으로 보이는 곳이 예전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객사터로 추정이 됩니다.
▼ 철엽을 달아 성문을 보호하고 있네요.
▼ 성문위의 모습으로 그림을 그려놓지 않고 간단하게 색상을 칠했네요.
▼ 육축은 상당한 큰돌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 금루관의 모습으로 예전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경우 서문이 가장 활발하게 사용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동문보다는 접근이 용이한 것이 사실입니다. 금루관을 오르는 것은 문화재보호차원인지 막아놓았습니다. 협문이 보이네요.
▼ 여장의 모습으로 우리가 보았던 여장과는 재질면에서 조금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성곽은 서문을 중심으로 40여미터만 복원을 하였고 아래 사진과 같이 사람들이 출입을 하기 좋게 복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 서문의 뒷모습으로 앞은 홍예식이고 뒤는 평거식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산 동래읍성의 경우도 그렇고 해미읍성 또한 마찬가기로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아래 그림에 나오지만 부산진성의 경우 앞과 뒤 모두 홍예식으로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서문을 발굴조사한다면 더 정확하게 성문의 양식이 나오겠지만요.
▼ 보물 391 호인 부산진순절도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숙종 35년(1709)에 처음 그려진 것을 화가 변박(卞璞)이 영조 36년(1760)에 다시 그린 것인데 처음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그림을 보면 부산진성 남문뒤에 동헌이 있고 동헌 뒤에 객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동헌 앞에는 외삼문이 있고 서문을 보면 서문 뒷편도 평거식이 아닌 홍예식으로 된 성문임을 알 수 있다. 위에 나온 사진과 비교하며 성문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조선후기의 부산진성에 관련되지는 않을 것 같고 임란전과 임란때의 부산진성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그림일 것 같다.
▼ 부산진순절도의 그림을 확대해본 모습으로 남문의 경우 옹성이 있지 않고 있으며 남문은 ㄷ자형태로 돌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누각은 1층 누각을 판문 등이 보이지 않고 있다. 남문도 홍예식으로 된 성문이며 성문은 철엽으로 성문을 감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장의 경우 타구가 존재하며 총안도 있음을 표시하였다.
▼ 뒤 수구의 모습으로 형태만 수구의 모양을 내었고 기능은 생략한 것 같습니다.
▼ 전체적인 여장의 모습을 알 수 있지만 깃발이 없는 관계로 성곽의 느낌은 살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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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여울각시 2009/06/06 20:28 # 삭제

    얼마전 자성대 다녀왔는데, 안그래도 궁금했는데,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 팬저 2009/06/06 22:02 #

    감사드립니다. 자성대에 이야기도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고독한승냥이 2011/07/12 00:42 #

    오늘 자성대에 다녀왔는데. 잘보고 갑니다~

    그쪽 현지 사는 분 말씀에는 '자성대에 봉화대가 있었다' 라던데 혹시 알수 있을까요?
  • 팬저 2011/07/12 01:02 #

    자성대의 봉화대라는 것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
  • 2020/06/22 02:4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20/06/22 15:5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20/06/22 16:2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20/06/22 18:5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20/06/22 19:4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한라온 2021/09/16 18:54 #

    오늘 증산왜성을 다녀왔는데, 만일 조선 초기 부산진성이 저 위치에 저 모양대로 있었다면 안에서 생활하는 군졸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슨 경사가;;;;
    성 부지 전체가 한 곳도 빠짐없이 가파른 경사지여서 밖에서 안이 보이는 백암성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상상이 되네요.
  • 팬저 2021/09/17 16:07 #

    왜성은 현재와 비교하는 것보다 당시에 어떻게 했을까 상상하면서 보면 더욱 더 현실에 와 닿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한라온 2021/09/21 16:45 #

    그런데 서문 금루관의 경우 지적도에는 남북 일자로 성곽이 지나가는데, 옹성으로 추측하신 부분은 사선으로 지나갈 뿐 아니라 금루관에 옹성이 있었다는 자료를 제가 접한 적이 없어서 조금 의문이 듭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팬저 2021/09/22 15:39 #

    옛날 사진에도 옹성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이부분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보다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 한라온 2021/09/30 19:16 #

    그렇군요. 좀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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