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대 왜성1 왜성(倭城)

1년전에 사진을 찍어 놓고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자성대왜성에 관련되어 포스팅을 하게되었다. 사진은 2009년 5월에 올려놓고나서도 선뜻 글을 못적었는데 큰맘먹고 적어려고 한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자성대라는 명칭은 부산진성을 모성(母性)이라고 하고 그 자식의 성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는 데서 나왔다고도 한다. 여기서 주목을 해야할 것은 부산진성을 모성이라고 하고 자식의 성이라고해서 자성 즉 부산진지성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이는 왜성을 기준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산진성에 관한 포스팅을 하면서 적었지만 자성대및 부산왜성의 경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7년간 주둔한 것이 전부이다. 전쟁이 끝나고나서 자성대위치에 조선후기 부산진성을 축성했고 자성대왜성을 부산진성의 본성으로 사용했으면 부산진성이라고 불러야 되는데 부산에서는 부산진지성 또는 자성대라고 부른다. 이는 일제시대때부터 불러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확실하지는 않다.) 부산진성 관련 포스팅을 보면 알겠지만 부산진성의 경우 일본성의 장점을 이용하여 만든 성곽인데 부산진성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부산진성1편에서 이야기하였지만 조전전기때의 부산진성만 역사의 한장면이라고 인식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근 400여년 이상 사용한 부산진성을 왜 부산진지성이니 자성대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왜군이 주둔한 것은 7년도 되지 않는데 400년이상 된 사용한 부산진성보다 위에 있는 것은 왜일까? 그래서 필자는 왜성이라는 측면만 알리고자 자성대왜성이라고 칭하고 글을 적으려고 한다.

아래 지도의 경우 현 자성대왜성의 평면도로 빨간색으로 된 것은 현재 남아있는 자성대왜성의 성곽부분이고 노란색으로 된 것은 1912년 지적도에 나타난 성곽의 부분이다. 현재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노란색으로 된 부분은 자성대왜성이나 부산진성의 중성의 개념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늘색으로 된 것은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성곽 부분이다.
자성대왜성과 부산진성의 본성은 임란당시인 선조 26년(1593년) 왜장 모리 테루모토 (毛利輝元)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자성대왜성의 경우는 왜장 아사노 사치나가 (淺野長慶)가 선조 31년 (1598년) 축성과 함께 외곽 구축까지 끝냈다는 설도 있다. 일본은 이 성을 소서성(小西城)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선조 30년(1597년) 왜장 고니시가 주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성대왜성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1598년 11월 22일 가토 기요마사의 명령으로 모두 불살라 버린뒤 퇴각 하였다.
▼ 자성대왜성은 현재 왜성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16세기 왜성이라 그런지 부산을 찾는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 것 중 하나이다. 일본 또한 성곽이 발달하였지만 일본내에 16세기 왜성의 경우 잘 남아있지 않아서 그런지 왜성을 연구하는 아마추어나 학계에서 많이들 찾아오고 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왜성의 성곽 기울기를 보면 왜성임을 알 수 있는 사진이다. 포토샵으로 측정을 해보니까 62도 기울기로 된다. 
▼ 자성대왜성의 경우 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어서 성곽의 위치 파악이 힘들다. 그래서 간단하게 A~I까지 성곽에 영문자를 표시하였다. 이것을 보고 아래에 나올 성곽이나 곡륜등을 이야기하면 이해하시기가 편할 것으로 보인다.
▼ 왜성의 경우 임진왜란이 있기전에 모모야마 시대[桃山時代]를 거치면서 성곽 건축의 번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왜성은 높이 쌓은 텐슈(天守'중요한 탑'이라는 뜻) 와 깊은 해자, 높은 석벽으로 둘러 쌓고 공적,사적 목적에 사용된 주거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오사카 성[大阪城]을 건축했고 이후 몇 개의 성을 건축했으며 그의 가신은 각자의 영지에 웅대한 성을 건축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에 의한 수로가 막히고 의병의 활동으로 인해 전라도 진출이 힘들어지자 남해안연안에 왜성을 축성하게 되면서 조선에 왜성이 등장하게 된다 . 이부분은 위 그림지도의 D부분이다.
▼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 세키가하라(關ガ原) 싸움에서 이겨 천하의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1614년에야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가 장악한 오사카성 공략에 나섰고 20만의 대군을 동원하고도 6개월만에야 겨우 함락시켰다고 할 정도로 일본왜성의 경우 2중 3중으로 된 성곽으로 구성이 되어있어서 방어에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 한국내에 있는 왜성의 경우 일본내에 있는 왜성은 산성이 점차 평지성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던 반면 조선에 축조된 왜성은 거의 대부분이 산성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군사적 긴장이 팽대한 전쟁의 상황에서 축조되었기 때문에 방어상 유리한 산성을 축조하였다. 또 왜성은 조선수군의 성곽이나 읍성 옆에 세워진 것도 특징중 하나인데 이는 왜성을 축성할때 사용할 수 있는 돌들을 가져오기 편한 이유도 있지만 조선인들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진성이나 읍성옆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진성이나 읍성이 아닌곳에 세워진 왜성들도 있는데 이는 육로가 아닌 해로나 수로를 통해 들여오는 조선군을 막기위함과 동시에 조선군의 움직임을 알기 위해서 세워졌다.
▼ 왜성의 축성을 보면 잔돌끼움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지금 남아있는 석축으로 봐서는 왜성의 장점을 알 수 없는데 석축위에 다시 목책이나 판벽을 설치하여 방어함으로 성벽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기 쉬울 것으로 보인다.
▼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를 보면 대략 4~5미터 정도로 보인다.
▼ 어떤 곳은 아래사진에 보는 바와 같이 높이가 3미터보다 작은 경우도 있다.
▼ 성곽에 많은 풀과 나무들이 엉커있어서 성벽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림지도의 F부분이다.
▼ 어느 한부분의 성곽으로 임진왜란당시 축성한 것과 이후 축성한 것이 보인다.
▼ 아래 사진에 나오는 부분은 임진왜란당시 축성한 자성대왜성의 성곽 부분이 아닌 것으로 보이고 그후 축성을 하였거나 최근에 축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왜성의 경우 이런 곡륜이 많은데 곡륜에 여러 모양의 각도를 주어 성벽으로 오르는 적을 원근, 좌우 등 다양한 위치에서 궁시 등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직선과 각으로 이루어진 곡륜형태는 일본 성곽의 독특한 점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나라의 경우 성벽이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일본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많지 않고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횡시처럼 곡륜에 각도를 주는 방식보다는 성 외각으로 사각모양의 치성을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 현재 북문에서 올라오면 보이는 곳으로 자성대왜성 당시 정문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위치상 이곳의 반대편이 성문일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현재의 위치는 A지점이다.
▼ 돌출형 소곽으로 우리나라로 치자면 치성과 가까운데 성문주위에 있는 관계로 일본측 입장에서 보자면 옹성과 같은 개념으로 봐야겠다.
▼ 경사가 많이 심하게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실지 측정을 하지 못하고 사진상으로 측정을 해보니 각도는 대략 41도 정도 되어 보인다.
▼ 보통 왜성의 경우 성곽 기울기가 70~80도정도 되는데 자성대왜성의 경우 기울기가 40~70도정도 된다, 이는 나즈막한 산을 이용하면서 왜 이렇게 축성을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 자성대왜성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사용하였고 그후 부산진성으로 사용을 하였는데 지금 있는 자성대왜성을 본성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왜성을 무너트리는 것 보다 낳을것으로 보인다. 왜성을 그대로 사용한 수군기지로는 부산진성의 경우와 함께 서생포왜성도 수군기지로 사용하였다.   
▼ E부분의 모습으로 자성대왜성의 성곽 기울기를 잘 알 수 있는 사진이다.
▼ 자성대 본성의 경우만 이런 식의 성벽기울기가 되어 있는지 외성 또한 이렇게 되어있는지 알 수가 없다.
▼ G부분의 모습으로 우리로 치자면 치성부분이고 일본왜성의 기준으로 보자면 돌출형 소곽이라고 하겠다.
▼ 소곽은 ㄷ자로 형성이 되어 있는데 본성을 방어하기 위한 방법으로 잘되어져 있는 것 같다. 외성의 경우 무너져서 알 수가 없지만 이런 방법으로 축성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 높이는 대략 5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 왜성의 축성방식을 보면 우리나라의 읍성이나 산성,진성의 축성방식과 달리 대충 쌓은 느낌을 준다.
▼ 성돌 또한 40~60센치 정도 되는 돌들을 하단에 쌓고 위로 가도 크기가 줄지 않는 방식이다. 조선초기때 축성한 연해읍성의 경우 1미터 정도 기단석을 쌓고 위로 가면서 작아지는 방식과 틀리다.
▼ 왜성의 곡륜은 90도 정도 꺽여져 있다.
▼ B부분을 올라가기전의 모습이다.
▼ 이 부분이 자성대왜성의 성문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 여기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수 많은 희생이 있고 나서 였을 것으로 보인다.
▼ 현재 남아있는 자성대왜성의 경우 본성정도만 남아있다. 한국성의 경우 본성 즉 성곽이 무너지게 되면 농성이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성내부에 방어시설이 없는것 때문인데 왜성의 경우 1차 성문이 돌파를 당해도 각각 독립적인 공간과 함께 전투를 할 수 있도로록 축성되어져 있다. 이는 조선군의 경우 백성과 함께 농성을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성곽을 축성한 것에 비해 일본의 경우 백성은 없고 전투원만 전투를 하기때문에 방어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축성하였습니다.
▼ 왜성의 경우 ㄱ자형이나 ㄴ자 ㄷ자형으로 된 축성하여 적이 성안으로 진입을 하여도 선두에선 공격조들은 제압당하기 쉽고 그길로 다시 올라와도 통로가 여러갈래로 형성이 되어있어서 혼란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 멀리 진남대의 모습이 보인다.
▼ 여기는 높이가 2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덧글

  • 유진우 2009/09/22 17:44 # 삭제

    어차피 니노마루나 산노마루는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성대는 혼마루도 일부 구간이 훼손되었네요

    여하튼 보다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겠습니다.
  • 팬저 2009/09/22 22:40 #

    혼마루의 경우 조선후기때 부산진성으로 사용하여 파손이 조금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개항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500여년 동안 있었던 것이 20~30년내에 사라졌다고 봐야겠죠.
  • 에로거북이 2009/09/22 20:01 #

    와 흥미진진하게 잘 봤습니다.
  • 팬저 2009/09/22 22:41 #

    미천하고 부족한 아마추어글에 좋게 봐주어서 감사합니다.
  • 도련님 2009/10/20 12:30 # 삭제

    좋은 정보 얻어가겠습니다.
  • 팬저 2009/10/20 15:03 #

    부족한 제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 한라온 2021/06/29 11:28 #

    잘 보았습니다......하늘색으로 표기된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경우 체성이 꺾어진 각도와 성벽의 기울기를 아무리 봐도 왜성의 것과 흡사해 보이는데, 혹 하늘색 부분도 임란 당시 왜성의 석축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제 안목이 보잘것없지만 제 눈에는 동문 주위 동남측 체성 일부 구간만 제외하고는 거의 70%정도의 구간이 왜성의 구조와 흡사해 보여서 말입니다. 치성이 없는 대신 요코야로 볼 수 있는 꺾임이 많은 것도 그렇고, 자성대왜성을 임란 때 훨씬 일찍 쌓고 한 번 철수했다가 5년이 지난 뒤 정유재란 때에야 증산왜성이 축성된 것을 보면 동래 및 부산 지역의 최중심 거점 중 하나로 기능했을 자성대왜성(당시는 부산성이라고 불렀겠지요)의 규모가 붉은색과 노란색 구간만 포함했다고 하기에는 동시기에 쌓은 다른 왜성들과 비교했을 때 지나치게 작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도심화가 너무 많이 진행되어 발굴조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 한입니다......... 일련의 글들이 2009년에 작성되었는데, 2021년 현재 팬저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듣고 싶습니다.
  • 팬저 2021/07/01 14:03 #

    지난 2009년 부산진성에서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왜성과 비슷한 기울기의 성벽이 발굴조사되었습니다.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90930000213 이는 조선후기 축성방식과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http://panzercho.egloos.com/10063013 일단 이 부분은 많이 나와있습니다.
  • 한라온 2021/07/02 11:08 #

    해당 부분은 현재 조선통신사역사관이 들어선 부지로군요.....제가 저 역사관을 가 본 적이 없어 성벽을 보존을 했는지 알 수가 없네요. 일단 기사글 감사합니다.
  • 중안조 2021/09/14 12:17 #

    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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