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포진성1 진성(鎭城)



다대포진성의 경우 임란당시 다대포전투가 벌어져서 첫 승전을 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정확한 위치가 나오지 않아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다가 다대포진성의 위치를 알 수있는 자료를 찾았습니다. 그전에는 대략 다대초등학교 근처였지 않나라고 이야기했었는데 위치가 맞더군요. 본 자료에 나오는 모든 사진에 관련된 저작권은 한국문물연구원에 있으며 고지도에 관한 저작권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위성지도에 관한 사항은 포털 다음에 저작권이 있습니다. 한국문물연구원에서 2006년 자료조사에서 나온 것이나 다대포진성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다대포지역에 관한 연구조사여서 다대포진성에 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면 더 정확하게 나올것 같습니다. 

▼ 다패포진성과 서평포진성의 위치를 나타낸 것으로 다대포진은 현재 다대포지역이고 서평포진은 감천항 근처인 구평동부근입니다. 
▼ 다대포진의 영역만 표시된 고지도로 1872년 지방지에 나온 다대포진입니다. 지금의 지형과 비교하면 바다를 매립한 것과 낙동강하구의 사구지역정도만 변화가 있다고 봐야겠네요. 그리고 뒷에 보이는 산이 아미산인데 봉수대가 보입니다.  다대포 응봉봉수대에는 도별장(都別將) 1인을 두었고, 그 밑에 별장(別將) 6명, 감고(監考) 1명, 봉군(烽軍) 1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영남은 다대포가 출발점이 되어 동래 황령산을 거쳐 영천,안동,충주를 경유 경기도 광주(廣州)를 통하여 최종점인 서울 남산까지 신호가 전달되었다.
▼ 고지도와 비교한 현재의 다대포지역입니다. 매립지역을 제외하면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 다대포진을 설치할 때 천혜의 자연을 이용하여 설치하였다고 보여지는데 이는 응봉봉수대를 기점으로 남측에 다대포진 그리고 서측에 서평포진을 배치하여 왜구의 공격을 알기위해 배치하였다고 보여지고 다대포진은 다대포진을 기점으로 좌우에 산들이 있는 만에 다대포진을 설치하고 태풍이나 파도를 대비하여 인공적인 산을 배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대포진 앞에 인공적인 산(방파제개념)이 보이는데 이부분은 다른 진성과 다르게 느껴지는군요. 그곳에 정자가 보이는데 이것 또한 지금의 초소와 같은 개념이지 않을까 싶네요. 이 인공적인 야산을 설치함으로 왠만한 파도들을 막아내어 포구에 정박한 전선들을 보호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그것도 부족한지 야산 앞에 인공적으로 보이는 방파제를 설치한 것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선박들은 우측으로 돌아서 다대포진으로 접근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전선이 보이는 곳에도 인공적인 방파제를 설치한 것이 보입니다.
▼ 지금의 지형에 조선시대와 비교하기 위하여 바다를 매립했던 곳에 바다로 처리해 보았는데 비슷할지는 모르겠네요. 다만 위 고지도에 나오는 다대포진성의 크기가 작아보이는데 진성이 있었던 곳을 화공이 그리면서 크게 강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응봉봉수대와 다대포진의 모습이고 우측의 길은 서생포진과 동래읍성(동래부)로 가는 길입니다.
▼ 학대해 본 다대포진성의 모습으로 4대문이 있고 여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동문과 서문의 경우는 옹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대문중 남문이 주 출입구이며 동문과 서문은 타 지역으로 가기위한 교통문으로 사용했으며 북문의 경우는 많이 사용하지 않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다대포진의 가장 가운데 객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객사앞에는 누각이 있고 전선은 3척이 배치된 것을 알 수 있네요. 다대포진성의 경우 평지에 조성된 평지성이며 정사각형에 가까운 성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이 성은 둘레 1,806척, 높이 13척의 석성으로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어 동문을 패인루(沛仁樓), 서문을 영상루(迎爽樓), 남문을 장관루(壯觀樓), 북문을 숙위루(肅威樓)라 했다. 성안에는 객사인 회원관이 있었는데 그 객사는 지금 몰운대에 옮겨져 있다. 구.다대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동헌(東軒)인 수호각, 군기소(軍器所)인 청상루, 금산소, 목소, 공방소, 도훈도소 등의 관아건물과 대동고, 유포고, 진창 등의 창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 현재의 다대포 모습으로 아래에 나오는 모든 사진들은 한국문물연구원에서 조사할때 찍은 사진들입니다. 다만 2006년 조사할때라는 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 조사 당시에 있었던 다대초등학교의 경우 2007년 현재의 다대초등학교로 이전하여 사용중입니다.

▼ 다대포항의 모습
▼ 한국문물연구원에서 조사하여 다대포진성의 성곽을 표시한 것입니다.
▼ 예전 다대초등학교를 기점으로 바라본 것인데 북측성곽의 경우 다대초등학교 담과 직선으로 연결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대초등학교가 이전했기 때문에 이부분에 관해서 조사가 이루어 져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며 현재 몰운대에 있는 다대진 객사가 원래의 자리로 이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 동측성곽에 있는 치성부근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사진으로 봐서는 하부는 알겠는데 상부는 현재의 돌들을 가져다 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네요.
▼ 구.다대초등학교 후문의 담으로 사용중인데 성곽에 사용중인 성돌의 크기는 사진상으로 봐서 50센치 이상되어 보입니다.
▼ 조사 당시의 다대초등학교이고 다대초등학교가 이전한 상태인데 부산시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활용할 지는 모르겠지만 다대포진성을 복원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윤공단은 1972년 6월 26일 지방문화재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다대1동 123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공과 함께 순사(殉死)한 군민(軍民)들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1765년(영조41) 다대첨사 이해문(李海文)이 다대객관의 동쪽에 설치한 제단(祭壇)이다. 다대첨사 윤흥신은 동생 흥제(興梯)와 군민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다가 장열히 전사하였다. 일설(一說)에는 첫날 왜적은 다대포진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윤공이 힘을 다해 물리쳤다고 한다. 그 이튿날 적이 다시 공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였으나 적의 공격이 전날보다 더 격렬하여 마침내는 모두가 순사하였다는 것이다. 원래 이 단은 성내(城內) 다대포첨사영이 있던 자리, 지금의 다대초등학교에 있었던 것을 1970년 12월 5일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윤흥신공의 비석 앞면에는「僉使尹公興信殉節碑」가 음각 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공의 전적이 기록되어 있다.비석 양쪽으로는「의사윤흥제비(義士尹興悌碑)」와 순란사민비(殉亂士民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제단 왼편으로는 지역을 다녀간 첨사 및 관찰사들의 영세불망비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 동문의 경우 고지도에서는 옹성이 있었는데 사진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 다대포진에 사용한 성곽의 축성방식을 보면 조선초기 성곽의 축성방식으로 보입니다.
▼ 남문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이 된다고 하는 곳으로 진성의 경우 성문이 작기때문에 성문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치성으로 추정된다고 하는 사진인데 저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  
▼ 다대포진성의 경우도 해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연구보고서에는 진성조사서가 아니라서 그런지 내용이 없더군요.
▼ 조사하시는 연구원과 비교하면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2미터정도 되어 보이네요.
▼ 성곽은 잔돌끼움 방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상부인지 하부인지는 몰라도 생각보다 상부에 큰돌들이 남아있네요.
▼ 세월이 많이 지났음을 알 수있는 사진으로 처음 축성시의 성곽과는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 아래 부분은 조선초기 축성방식인 것 같고 위는 최근에 잔돌을 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 성벽이 축대의 일환으로 사용중인데 시멘트로 군데군데 발라놓은 것 같습니다.
▼ 사진 좌측에 보면 면석의 크기가 상당한 것이 보입니다. 높이는 대략 70~80센치 정도 되어 보이네요.
▼ 남측의 성벽은 동측 성벽과 달리 조선후기때의 성곽축성방식으로 보이는데 이는 임란후 보수를 하면서 쌓은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아마추어인 제가 추측하는 것이라 틀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부분에 관해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더 정확히 알 수가 있겠죠.
▼ 아래 사진에 나오는 성곽의 성돌들은 위에서 본 사진들과 달리 성돌들이 크고 조선초기때의 축성방식으로 보입니다.
▼ 위의 자료를 가지고 제가 위성지도에 작성한 다대포진성의 성곽과 성문의 추정으로 동측과 남측의 성문은 한국문물연구원에서 추정하는 것이고 서측의 경우는 제가 추정하는 것입니다. 다대초등학교의 경우 1904년 개교하였다고 하니까 다대포진성의 경우 그 이전부터 사라지게 되었고 북측의 경우는 도로가 개설이 되면서 대부분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 위의 위성지도에 표기한 성곽보다는 아래 위성지도에 표기한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북문의 경우는 구.다대초등학교 담장부근으로 추정이 됩니다.
다대포진의 경우 원래 첨절제사영에는 4품인 만호가 수장으로 근무했으나 다대영은 그 지정학적인 위치가 중시되어3품 당상관이 수군첨절제사로 임명되었다.임진왜란이 지나고서는 경군문구근차제과(京軍門久勤差除窠가 설치되어 다대첨사영만은 기한 없이 오래근무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는 왜구의 침입을 가장 먼저 맞게되는 최전방이라는 인식속에 이루어 진것으로 보입니다.
1654년(효종5)에는 첨사를 목장의 감목관(監牧官)에 임명하기도 하여 겸임케 하였다. 1751년(영조27)에는 다대진은 왜적이 침범하는 길목이라 하여 변지구이력과(邊地區履歷窠를 설치하여 다스리기도 했다. 첨사 밑에는 군과 14명, 진리(鎭吏) 24명, 지인(知引) 13명, 사령(使令) 10명, 군뢰(軍牢) 8명 등이 있어 첨사의 사무를 돕기도 했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서 더 정확한 자료가 나온다면 다시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덧글

  • 번동아제 2009/05/16 21:45 #

    잘 읽었습니다

    잘 지내시죠?

  • 팬저 2009/05/17 00:33 #

    예 동해바람은 시원하죠. 저는 시간이 안되어서 못갔는데 갔으면 뵐 수 있었는데 아쉽네요. 건강하시고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 길군 2009/06/04 13:55 # 삭제

    시간을 투자해서 본 보람이 있네요... 잘 구경하고 갑니다. ^^
  • 팬저 2009/06/07 01:21 #

    감사합니다.^^
  • 2009/07/20 12:55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팬저 2009/07/20 12:58 #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네요. 좋은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 불잔차 2009/09/20 21:38 # 삭제

    우와~ 멋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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