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읍성1 읍성(邑城)



경남 합천군의 경우 조선시대에는 3개의 읍치가 있었던 곳이다. 합천읍은 합천군으로 초계면은 초계군으로 삼가면은 삼가현이었는데 1914년 삼가면과 초계면 그리고 합천군이 합쳐져 합천으로 바뀌면서 삼가현의 경우 자그마한 면으로 자리잡게 된다. 합천군 지도를 보면 합천강을 중심으로 합천읍이 있고 합천읍을 기준으로 동측으로 보면 초계 남측으로 삼가면이 있는 것이 보인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당시 삼가면에서도 1919년 3월 18일 만세운동을 할 정도로 많은 인구가 있었다. 삼가의 경우 서측으로는 산청 남측으로는 의령이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의 경남 합천군 삼가면, 가회면, 대병면, 쌍백면, 신원면 일대가 삼가현의 관할이었고 읍치는 삼가면 금리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 삼가의 경우 한우로 유명하며 삼가한우의 경우 경남지방에서 아주 인기가 많다.
해동지도에서 본 삼가읍성의 모습으로 다른 읍성과 다른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외성과 내성이다. 그리고 읍성의 경우 북으로는 산을 끼고 남으로는 강을 낀 평산성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천혜의 자연을 이용한 읍성임을 알 수 있다.

삼가면사무소에 삼가에 관련된 글을 보면 "삼가현은 고려때 삼기현과 가수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을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 첫 글자를 따 삼가라 불렀다. 삼기현은 지금의 대병면이었는데,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이곳에 삼지현을 설치하였고, 35대 경덕왕이 이곳 지명을 삼기현이라 고치고 강양군의 영현으로 부속시켰다. 그후 고려 8대 현종 9년(1018년) 에 합천의 속현으로 두었으며 공민왕 22년 (1373년)에 22년에 감무를 두어 다스렸고, 별호는 마장이라고 했다. 가수현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가주화현으로 불렀고, 35대 경덕왕때 강주(진주<晋州>) 관할에 두었다. 고려조 이후부터 삼가현의 현청을 현재의 삼가쪽으로 옮기고 현감을 두었는데, 1914년 합천군에 병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당시 삼가현의 관할은 현재의 삼가와 쌍백면, 가회면, 봉산면 일부와 거창군 신원면, 의령군 봉수면 일부, 대의면 일부였다. 그리고 조선 고종 32년(1895년)에는 현에서 군으로 승격 명실상부한 행정의 중심부가 되었으나 19년만에 다시 면으로 격하되어 옛날의 권위는 찾을 수 없다."
지승에서 본 삼가읍성의 모습이다. 외성과 내성이 있고 동측에 객사 좌측에 동헌이 있음을 알 수 있고 삼가읍성 위에 금성산성이 보인다. 또 우측으로는 유린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872년 지방지에서 본 삼가읍성입니다. 위 두지도와 달리 4대문과 함께 외성의 모습이 정확하게 나온 것을 알 수 있는데 외성의 경우 내성과 달리 토성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남문앞에는 수창지라는 연못을 두어 2중의 해자를 만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해자가 양천강 그리고 두번째 해자가 수창지입니다. 객사의 경우 남문 바로 뒤에 있고 동헌의 경우 서측성곽과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가읍성의 모습으로 관수루의 모습이 잘보인다.
1910년 지적원도를 기준으로 삼가읍성 성곽을 추정한 것으로 빨간색으로 된 성곽은 지적원도를 기준으로 작성된 것으로 정확도면에서는 이상이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핑크색으로 된 외성의 경우 임의로 추정한 것이기 때문에 틀릴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현재 삼가읍성에 관한 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된 것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지표조사나 발굴조사를 제외한 것은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위 항공지로를 기준으로 봐도 삼가읍성의 경우 천혜의 자연을 이용한 읍성임에 틀림이 없으며 현재 읍성의 성곽이나 치성들은 무너져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삼가읍성의 경우 대동지지에 의하면 석성이며 둘레가 3,259척, 높이가 9척이었다고 합니다.삼가읍성의 외성의 경우 외성이라는 역활보다는 양천강물의 범람을 막기위한 둑의 역활을 많이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가군지에, "삼가읍이 큰 시내로 둘러싸여 있어서 땅이 낮고 습해 성문(城門)과 관청집과 백성집 및 장터"가 본래부터 물이 내려가는 길이다"라는 기록을 보면,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방천이라는 나지막한 둑이 있기 전부터 삼가의 지세는 낮고 습했음을 알 수 있다. " 그후 삼가현감 임사준이 농한기를 이용하여 부역군을 뽑아 옛 둑을 다시 견고하게 쌓았다고 하는데 이때가 1862년(철종 13년)8월이라고 합니다. 지방지가 그린 것이 1872년이니까 이부분에 관하여는 이해가 되는데 다른 해동지도나 지승에서는 석성의 외성이 있는데 이부분에 관하여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적원도의 자료는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인 최원석교수의 "지적원도를 활용한 읍성공간의 역사지리적 복원 -
경상도 읍성을 사례로" 라는 논문에서 삼가읍성의 지적원도를 가져왔으며 지적원도만 있어서 현재의 지형과 알 수가 없어서 제가 다음지도를 가지고 지적원도를 다음지도에 대비하여 만든 것입니다. 지적원도를 작성한 당시와 지금의 모습이 많이 틀려 성곽을 추정할 수 없었으나 지적원도에 나온 주 간선도로를 기준으로 맞추었더니 상당부분 이상이 없어서 성곽추정도를 올리는 것입니다. 다만 아마추어인 제가 올리는 것은 조금은 틀릴 수 있습니다. 보다 정확한 것은 문화재연구원 등에서 지표,발굴조사를 하는 것이 정확하리라 생각이 듭니다.



핑백

  • 팬저의 국방여행 : 경남 백의종군로 사업1 2009-08-08 10:58:41 #

    ... 당시에는 합천,초계,삼가지역으로 모두 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초계에서 관아를 복원한다고 하니 삼가지역에서도 우리도 삼가 관아를 복원해달라 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삼가읍성 바로가기 ... more

덧글

  • 과객 2009/06/07 21:23 # 삭제

    삼가는 남명 조식 선생의 탄생지로 그의 후학인 임진왜란 때의 곽재우 장군등 의병활동과 그 영향을 받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의령의 백산 안희제 선생등의 이 지역 의병.독립운동의 정신적 근원이 되는 상징적인 곳이지요. 삼가는 일제시대때 격렬한 만세운동으로 수십명 이상의 순국자들이 발생한 항일의 고장이기도 하고 삼가가 조선시대 읍성까지 갖춘 군의 위치에서 일제의 행정구역 정비로 합천에 편입되어서 그 위상이 줄어든건 이 고장의 기를 죽이려는 일본의 의도가 개입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경기도에 양평에 편입된 지평군(양근군+지평군=>양평 이됨)도 단발령에 반발해서 일어난 을미의병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삼가지역과 같이 위상이 군에서 강등되어버렸지요 저는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의도적으로 위상이 강등되며 통폐합되어 버린 이런 고장들을 다시 복권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팬저 2009/06/07 23:00 #

    삼가지역은 말씀하신 것처럼 조식선생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죠. 저는 읍성을 먼저 조사(지표조사나 발굴조사)하는 것이 더 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삼가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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